[정만진의 문학 향기] 끝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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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17   |  발행일 2022-06-17 제15면   |  수정 2022-06-17 11:17

[정만진의 문학 향기] 끝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
정만진 (소설가)

1995년 6월17일 소설가 김동리가 세상을 떠났다. 김동리는 '무녀도' '등신불' '까치소리' '흥남철수' 등 많은 수작을 남겼다.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대사전'은 그를 "한국의 현대소설가들 가운데서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가장 깊이 관심을 기울인 작가로 평가"한다.

김동리 단편 '황토기'의 무대는 황토골이다. 금오산 아래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온통 붉은 황토 천지이다. 굴러 떨어진 바위에 상처를 입은 용이 한없이 피를 흘린 나머지 이처럼 흙이 붉어졌다는 말도 있고, 압록강 너머를 위협할 장사가 태어날 기미가 있다면서 중국인이 땅의 혈을 자르는 바람에 지금처럼 황토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황토골의 두 천하장사 억쇠와 득보가 여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겪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끝없는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다투는 까닭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독자도 그 분위기만은 대략 헤아려진다. 붉은 흙이 풍겨내는 독특하고 강렬한 느낌 때문이다. 긴 농경사회를 살아온 동양인에게 황토는 고향의 흙이었다. 그 흙에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가족사의 애환이 서려 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식구의 생활이 묻어 있다. 게다가 언젠가 돌아가야 할 내세의 아늑함이 황토 속에 평온히 배어 있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도 중국 황하 일원은 동양 최초의 문명 발상지였다. 결 고운 흙이 기나긴 물과 바람을 타고 옮겨와 사람 살기 좋은 옥토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 고마운 강을 황하라 불렀고, 황하가 흘러 들어갈 바다를 황해, 죽은 뒤 사람이 갈 곳을 황천이라 했다.

하지만 기원전 3천년의 황하도, 1939년 발표작 '황토기'도 다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UN은 1994년 제49차 총회에서 6월17일을 '사막화 방지의 날'로 지정했다. 지금처럼 점점 사막이 넓어지는 추세가 지속되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우리도 중국 사막지대에서 날아오는 황사로 고통받고 있다. 이제 황(黃)은 더 이상 좋은 글자가 아니다.

억쇠와 득보가 끝없이 싸우듯이, 최첨단 과학이 선사하는 무한 풍요를 구가하며 원없이 살아가리라 자만해온 현대인 또한 생존 위기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억쇠는 힘 한번 써볼 날을 기다려온 소설적 존재이지만, 소설이 아닌 우리의 실존은 그럴 의지도 없으면서 하릴없이 싸움터로 내몰리고 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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