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제주도 난개발에 반대하기 위해 현장 투쟁가로 나선 안재홍. |
내게 너무 편한 고무신에 삐딱한 시선
표리부동한 전교조 이념·학교의 가치
민주화~X세대~노동운동~인터넷 세상
대구 북구 복현동에서 태어났다. 나를 환경운동가로 만든 두 사건이 있다. 학창시절 난 신기 너무 편한 백고무신을 애용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학교 측에선 그걸 하나의 '삐딱함'으로 받아들였다. 난 학생부장에겐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평소 체육선생은 내 고무신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학생부장이 '고무신은 안돼'란 단호한 입장을 취하자, 슬그머니 평소의 입장을 바꾸었다. 수직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었고 내겐 멘붕의 시간이었다.
그다음 해프닝은 역사시간에 생긴다. 백척간두의 한말, 청나라·일본군의 한반도 진주를 격앙스럽게 비판하던 선생님,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 그렇다면 우린 아직 독립이 안 된 나라가 아니냐"란 내 반문에는 일언반구 못하는 그분한테서 난 또 상처를 입는다. 겉과 속이 달라야 살 수 있는 기성세대였다. 거룩하고 찬란하고 정의롭기만 한 교가와 교훈의 학교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표리부동한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전교조의 이념과 학교의 가치는 공유될 수 없었다. 인기짱이던 한 전교조 교사의 축출. 전교생이 들고일어났다. 그 기세에 찔끔 놀라 아이들 눈치를 보던 기성세대, 특정 학생의 단발성 반발에는 '몽둥이 같은 욕설'을 가차 없이 퍼붓던 그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진심인지를 알기 어려웠다.
혼돈의 맘을 품고 나는 경북대 사회학과에 입학한다.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찾아든 민주화의 물결. 그 속에서 X세대로 등장한 젊음의 욕망은 이념의 그릇에는 절대 담길 수 없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서울 강남에는 소비성 짙은 '오렌지족'이 발흥하고 있었다. 동시에 더욱 강력해진 노동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인터넷이 주도하는 네트워크세상의 여명기도 밝아오고 있었다.
부모처럼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는 두 딸의 놀이터인 올레길을 배경으로 손수레를 밀며 곧 오픈할 카페 마무리 공사에 한창인 안씨. |
분화되는 운동권
불타는 애국심·출세 욕망 혼융 청년기
新민주화운동으로 다가온 '환경 투쟁'
경실련·한살림운동·환경연합 등 태동
사명감과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기와 출세의 욕망을 중시하는 청년기가 혼융된 시기였다. 가열한 운동권의 열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그 경계의 능선을 걸어갔다. 나를 사로잡을 그 어떤 가치를 찾아 헤맸다. 그 어름에 큰 사건이 발생한다. 지구환경 문제를 전 세계 지도자가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결심하는데, 그게 1992년 발족된 '리우환경회의'다.
TK(대구경북) 정권이 저지른 것이라 볼 수 있는 5·18광주의 비극. 달빛동맹 이전에 영호남 학생들이 먼저 손을 잡았다. 광주의 금남로 같은 대구 한일극장 앞 대로에서 영호남 합동 도로점거 시위를 했다.
수많은 사회운동의 갈래. 나는 그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었다. 독재타도에 버금가는 새로운 테제가 바로 '환경운동'이란 판단을 했다. 환경투쟁하는 게 '신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경제민주화 운동의 기수 경실련, 참먹거리운동의 기수인 한살림운동,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등이 분파적으로 태동하고 있었다.
대학생 녹색네트워크
대학생 환경운동 '대학 YMCA' 가담
해외 교류…韓日 학생 환경선언 도출
나는 대학 YMCA에 가담했다. 90년대 말 생겨난 '대학생 환경운동 그룹' 출범에 한 역할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대구만의 '대학생 녹색 네트워크'가 생긴다. 낙동강 페놀사태가 일어났지만 아직 환경보호란 의식이 시민들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을 주시했다. 환경보호 인프라가 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걸 따라잡기 위해선 그들과 교류를 해야만 했다. 역사적으로는 교류 단절이지만 환경에서만은 교류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환경은 국민, 국가, 국경, 민족, 종교를 초월하는 숭고한 가치인 탓이다.
대구와 서울의 대학생들이 모여 '지구를 위한 학생연대'를 발족시킨다. 서울녹색연합 산하 국제교류단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본 대학생 환경그룹과 교류행사를 갖자는 제안이었다. 98년 여름 도쿄에 갔다. 도쿄의 쓰레기소각장을 방문했다. 이후 교류 행사는 10회 정도를 했다. 그 과정에 '한일 학생 환경선언'도 도출해낸다. 한·중·일 교류 행사를 위해 중국 황사발원지까지 방문했다.
환경에서 생태운동가로
직장 접고 굵직한 환경파괴 사업 규탄
정부 강행 의지엔 역부족…생태 주목
환경 위한 삶…완전 채식 '비건' 전환
내겐 괜찮은 직장이란 개념이 없었다. 직장을 포기했다. 그리고 현장을 선택했다. 그냥 환경운동가로 살고 싶었다. 이후 서해 새만금방조제, 영종도신공항, 4대강 개발 등 굵직한 환경파괴 규탄 시위 현장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가 하겠다고 선언한 매머드 개발사업은 강원도 동강댐을 제외하곤 모두 강행돼버렸다.
환경에서 점차 '생태'로 주제를 좁혀들어갔다. 20년 전부터 일단 육식을 버리고 채식주의자로 몸을 틀었다. 13년 전부터는 계란과 생선조차 먹지 않는 완전채식인 '비건'으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2000년 성찰의 순간이 왔다. 환경운동, 그럼 내 삶도 더불어 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강 오염 주범 중 하나인 축산폐수를 줄이기 위해 채식을 시작한다. 채식 문화의 확산을 위해 황성수 박사와 '다이어트를 위한 채식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2013년 현미 채식 체험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다.
녹색소비자연대와 영남자연생태보존회 사무국장을 맡는다. 생각은 지구적으로 행동은 지역적, 그래서 협동조합 등을 통해 생태소비자운동을 전개한다. 소비자가 변해야 생산자를 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생산자의 생사여탈권은 결국 소비자의 태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채식을 하기 시작한 안씨가 평소 먹는 현미 채식 식단과 2013년 자신의 채식 체험기를 녹여낸 책. |
환경·노동자 악덕기업 표적 불매운동
이해 갈린 한일극장앞 횡단보도 설치
제주 벤치마킹 '대구 올레' 기틀 마련
1차적으로 맥도날드 포장지에 주목했다. 지금은 종이 포장지를 사용하지만 그때만 해도 스티로폼 포장지를 사용했다. 그걸 바꾸기 위해 사장 집으로 포장지를 항의 우송했다. 결국 종이포장지로 바뀌게 된다. 또한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괴롭히는 악덕기업에 대해서는 표적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농업의 현실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농약에 길든 관행농으로 인해 우리의 토질은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지력갱생과 유기농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녹색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서둘러 만들었다. 친환경 학교 급식을 위해 관련 조례도 개정시켰다. 매월 한 번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모여 수성못까지 인라인스케이트 대행진도 진행했다.
내가 제주도로 들어오기 전 가장 오래 장기전을 벌여 성사시킨 게 있다. 바로 한일극장 앞 횡단보도 설치였다. 이해가 엇갈린 문제였다. 지하도 가게 주인들은 나를 원수로 규정했다. 심심하면 협박을 했다.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애인연맹 관계자와 김범일 시장실을 자주 항의 방문했다.
제주도 올레를 중시했다. 제주올레의 주역인 서명숙 이사장을 대구로 초대해 특강을 들었다. 전국에서 맨 먼저 그녀에게 특강을 요청했던 탓에 그녀도 무척 놀란다. 그녀의 도움을 받아 금호강, 비슬산, 앞산 등을 묶는 '대구 올레'의 틀을 짤 수 있었다. 예술문화가 중시되던 시절이라 팔공산에 거주하는 예술인들을 연대하는 모임체도 결성시켰고 동화사에서 관련 전시회도 갖는다.
신재생에너지운동을 위해 에너지시민연대 사무국장도 맡았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귀농학교'도 운영하면서 신천우방아파트 직거래장터도 성사시킨다.
제주도로 건너가 8년간 현지에 적응하면서 만난 토박이, 녹색당 관계자들과 만든 공유 멀티인문학공간 구실을 하는 교육공동체 건물 '이음' 앞에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안재홍씨. |
재생을 위한 제주도행
지구 환경 파괴 악순환, 몸·정신 피폐
8년전 충전·재도약 위해 선택한 제주
제철 채소·과일 담아낸 채식카페 준비
그렇게 몸부림을 쳤건만 세상은 더 혼돈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최악의 초미세먼지 사태. 그리고 코로나19 충격까지. 이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운동도 불가항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조와 제도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했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욕망을 부추기는 체계다. 그 결과 지구환경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기아, 전쟁, 빈부격차 등이 악순환 중이다. 이로 인해 사회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내 몸과 정신은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그래서 2012년 1월 제주도로 와버렸다. 충전과 재도약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거의 '제주인'이 돼버렸다. 농지도 임차해 120여 그루의 감귤도 심었다. 아내는 2년쯤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했지만 아이 양육을 위해 포기했다. 2014년 현재 마을로 이사를 왔다. 2015년부터 제주 녹색당에 맘을 포갰고 이어 애월교육협동조합인 '이음'을 만들어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 100여 가족이 동참한다.
곧 채식 카페가 문을 열 것이다. 각종 첨가제와 설탕과 계란, 우유 등이 빠진 천연발효종 우리 밀빵, 그리고 계절이 담긴 채소와 과일류 등을 샐러드 방식으로 담아낼 것이다.
땅의 일상을 보면 싸워야 할 것 천지인데,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면 화해해야 할 것 천지다. 그 경계점이 어딘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안재홍의 제주 담론
대구의 10·1, 그리고 제주도의 4·3. 두 공간은 여수·순천과 함께 근대사의 탄흔을 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모두의 것이었던 제주의 자연이 재벌들과 거대자본에 의해 일상이 난도질되고 있다. 모두의 소유였던 마을 공동의 목장이 팔려나가고 바다오염으로 해녀들이 물질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 관광객이 몰리고 땅값이 급등한 월정리 앞바다에서 해녀들은 물질을 할 수 없다며 대책을 세우라고 시위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 이 좁은 섬에 공항을 하나 더 짓겠단다. 더디더라도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