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투 재조명] (끝)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역사적 의미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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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9-15  |  수정 2011-09-15 07:26  |  발행일 2011-09-15 제4면
한·미 최초 연합 방어작전 수행
한강방어선·대전 전투 패배 뒤 첫 승리 자신감 심어줘
학생들까지 전쟁터로…전 국민이 전·후방서 전투 참여
[낙동강 전투 재조명] (끝)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역사적 의미
북한군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자발적으로 볼펜 대신 자신의 키보다 더 긴 M1 소총을 들고 낙동강전투에 뛰어든 학도 의용군들의 모습. <육군대학 전사연구실 제공>

6·25전쟁 당시 최후의 방어선으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방어선 전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다음 몇가지 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미가 최초로 연합전선을 형성해 방어작전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수준은 개전 직전까지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한 소부대 전투경험은 있었지만, 75% 이상의 부대가 대대 및 연대 단위의 전술훈련을 해보지 않은 채 전투에 임하다 보니 사단급 이상의 대부대 전술에는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사에 위임하게 된다. 1950년 7월17일 ‘미 8군 일반명령 3호’로 지상에서 작전하는 한국군과 유엔군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지휘권이 재위임됐다. 당시 병력과 장비, 교육훈련 수준이 미군에 비해 열세였던 한국군의 상황으로 미뤄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산악지대의 침투, 근접전투, 우회기동이 뛰어났지만 기동공간이 넓은 지역에서 화력의 운영이 용이한 개활지 전투가 취약한 점을 감안해 낙동강방어선은 미군에게는 낙동강 일원의 개활지를, 국군 5개 사단은 낙동강 상류의 북부 산악지대를 각각 책임지도록 하면서 연합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과의 연합작전 수행을 위해 카투사(KATUSA)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한·미 연합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로는 대한민국 국민과 군에게 최초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물론 초기전투에서 소규모로 승리를 했지만 한강방어선 전투, 대전지구 전투의 연이은 패배의 좌절감 속에서 미국과 유엔군 일부에서도 한반도를 포기해야 되지 않느냐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시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토의 9분의 1 정도밖에 남지 않은 낙동강방어선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방어선이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미 8군의 참모들에게 “한국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다. 한반도에서 제2의 덩케르크가 더 이상 재연되서는 안된다”며 이런 우려를 일언지하에 잠재웠다. 반면 북한군은 김일성이 8월15일 광복절 행사를 부산에서 치러내겠다며 전선사령부에 독전을 주문했다. 하지만 초기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참선이 크게 늘어난 상태 하에서 소년병까지 징집하는 무리한 돌파 시도는 북한의 전투 사단들에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 결과 8월22일 오전 10시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가 백기를 들고 귀순하기에 이른다. 이는 김일성의 무리한 독전에 대한 혐오감과 사단장의 다부동 전투 포격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에서 야기된 것이지만 당시 북한군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셋째,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전후방에서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무기를 들 수 있는 학생들은 학도병 또는 학도 의용군으로, 나이가 들어 그마저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에 참여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노무자로 참전했다. 7월27일에는 대한 학도의용대가 육군본부의 승인 하에 대구에서 ‘죽음으로 나라와 겨레를 지킬 것을 선서한다’는 출전선서를 했으며, 8월초에는 유격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학도기간대를 편성한 뒤 밀양의 유격대와 통합운용됐다.

끝으로, 정부와 국민의 확고한 전쟁수행 의지를 들 수 있다. 낙동강 방어작전시 이승만 정부는 전쟁지도본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정부는 미국과의 공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유엔과의 협력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시내각 기능을 수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은 국토를 사수하기 위해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 대책위원회를 설치해 비상시 향토방위령, 피란민 수용에 관한 임시조치령, 징발보상령, 육군 보충장교령 등 전시에 긴요한 치안, 피란민 수용, 징발, 병력 보충 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다. 아울러 지연전 기간동안 부족한 한국군을 충원하기 위해 경남 및 제주도 지역에 신병훈련소를 설치, 일선 부대에 부족한 병력을 보충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 수도인 대구가 북한군의 직접적 위협을 받고 있을 때에도 항전의지를 굽히지 않자 맥아더와 무초 대사가 설득해 마지못해 부산으로 임시정부를 옮긴 일화는 정부와 국민의 일치단결된 저력을 보여 주는 실례다. 반공과 국가 수호라는 정부의 전시내각 목표는 북한군 점령지 하에 있던 주민들을 낙동강방어선 안으로 몰려들게 했으며, 전시에 모든 국민이 동참하는 총력전 체제로 최대의 국가 위기를 타개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이는 결국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특히 유엔의 집단안전보장 조치에 의해 최초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내면서 자유세계 수호를 위한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했다는 데서 또다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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