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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한 낙동강전선내 영천지구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포로가 된 북한군 소년병들. 10대중반의 앳돼 보이는 소년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육군대학 전사연구실 제공> |
유엔군의 신속한 역습과 병참선 차단작전으로 북한군은 1950년 8월 공세에서 부분적인 돌파구에 대한 전과 확대를 달성하지 못한 채 공격능력의 한계에 다다르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바쳐 싸우자”고 독려하면서 북한군은 마치 도박에 빠져 미쳐버린 사람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벼들 듯이 독전을 강요했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제16·17 기갑여단을 비롯한 모든 예비부대와 장비를 투입, 8월31일에 최후공세인 이른바 9월 공세를 감행했다.
◆북한군의 9월 최후 공세
북한군은 8월 공세의 경험을 통해 9월 공세는 어느 한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지 않고, 이용 가능한 모든 접근로에서 야간전투와 침투전술로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돌파된 정면에서 전과 확대를 올린다는 계획을 짰다.
모두 6개 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 1군단은 2개의 공격집단을 편성, 1공격집단은 마산에서 부산방향으로, 2공격집단은 창녕에서 밀양방향으로 각각 공격에 나섰다. 북한군 2군단은 7개 사단으로 구성됐다. 2군단은 3개의 공격집단을 편성한 뒤 3공격집단은 왜관에서 대구방향으로, 4공격집단은 영천에서 대구 또는 경주방향으로, 5공격집단은 안강 및 포항에서 경주방향으로 각각 공격했다.
◆부산까지 위협받은 절체절명의 위기
북한군은 먼저 1군단이 8월31일 야간공격을 실시한 결과 6사단이 함안지역을 탈취했지만 이에 맞선 유엔군은 예비부대인 미 27연대의 역습을 통해 다시금 북한군을 격퇴했다. 창녕·영산지역의 북한군도 미 2사단을 공격해 낙동강 돌출부 지역을 돌파하고 창녕과 영산을 위협하면서 밀양방향으로 진출하려고 했지만,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중이던 미 해병5연대를 투입해 가까스로 저지하기에 이르렀다.
북한군 2군단은 가장 위험했던 창녕·영산지역을 목표로 9월2일 밤중에 총공세를 감행했다. 왜관지역에 주둔 중인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공격집단의 공격을 받아 9월5일 칠곡과 팔공산 일대까지 밀리면서 대구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 지역도 북한군 5공격집단의 공격을 받아 9월4일 안강과 포항지역을 뺏기면서 경주가 위험한 상황이 놓였다. 또한 신령과 영천지역의 국군 2군단은 북한군 4공격집단의 공격으로 9월6일 오전 7시쯤 영천까지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이 대구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왜관·다부동 일대의 한·미군 방어선 후방이 차단되면서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었다. 또 경주방향으로 진출한다면 기계∼안강일대의 돌파구와 함께 부산에 이르는 동해안 통로가 열리면서 부산이 위협받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낙동강방어선 사수 총반격 작전
이 때 미 8군사령부는 예비방어선인 데이비드슨(Davidson)선(線)으로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며, 한국의 국방부와 육군본부도 9월5일 자정쯤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대구 사수결의와 함께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도 상륙작전에 호응해 반드시 총반격작전이 전개돼야 한다는 전제 하에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구의 전방지휘소에서 예하지휘관들을 모아놓고 결전을 독려했다.
한편 영천과 안강 정면이 적에게 돌파 당하자 육군본부는 영천지역의 미 8사단을 국군 2군단이 지휘하도록 군단 전투지경선과 작전지휘관계를 신속히 조정했다. 또 국군 2군단장(준장 유재흥)은 포항지역의 국군 3사단에 배속됐던 8사단 10연대를 복귀시키고, 국군 1·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차출해 영천지역으로 전환배치했다. 미 8군으로부터 미 1기병사단의 전차 1개 소대(5대)를 지원받는 등 가용 전투력을 영천지역으로 신속히 집중시키면서 북한군과의 운명을 건 결전에 총력 대비했다.
◆전세역전의 발판 마련한 영천지구전투
북한군은 15사단 예하 5개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영천 남쪽까지 24㎞에 이르는 낚싯바늘 모양의 대규모 돌파구를 형성했다. 이에 맞서 7개 연대의 병력을 투입한 국군 2군단은 북한군의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면서 국지적인 역습을 지속적으로 편 결과 돌파구 내 적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이어 9월10일에는 총반격에 나섰고, 9월13일에는 그동안 상실했던 방어지역을 전부 회복하는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북한군의 9월 공세 역시 8월 공세처럼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한 상황에 다다랐으나 공격부대가 지니고 있는 주도권 확보의 이점을 활용, 최후공세를 개시해 여러 축선에 돌파구를 형성했다. 하지만 추가 전투력 투입의 한계로 인해 결국 공격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반면,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겠다는 확고한 결의와 함께 신속한 예비대의 전환과 역습으로 적의 공격을 말끔히 격퇴시켰다. 특히 9월 공세에서 영천지구전투는 낙동강방어선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육군본부와 군단의 과감한 지휘조치와 전투력의 집중, 돌파구의 견부 확보와 적극적인 공세로 위기를 탈출했다. 이는 어렵게 확보한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6·25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됐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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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경북본사 1부장 임성수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