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전투 재조명 .1] 위기서 더욱 빛난 낙동강 방어선 전투 서막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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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09-09  |  수정 2011-09-14 11:15  |  발행일 2011-09-09 제4면
방어작전 실패했다면 "태평양 작은 섬으로 쫓겨났을 것”
美, 사모아 제도에 대한민국 이주 계획 수립
낙동강 방어선 사수로 서울 수복 발판 마련
[낙동강 전투 재조명 .1] 위기서 더욱 빛난 낙동강 방어선 전투 서막
남침한 북한군의 맹공격으로 남한 면적의 10% 밖에 남지 않은 1950년 8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전선에서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참모들과 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육군대학 전사연구실 제공>

1950년 9~10월 낙동강전선은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구해낸 구국의 방어선이었다. 불의의 기습으로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한 면적의 10%만 남겨둔 채 모두 점령했다. 국군과 연합군은 용전분투 끝에 낙동강전투에서 승리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육군 제2작전사령부는 오는 29일 낙동강전투전승행사를 갖는 등 낙동강전투 전승(戰勝)을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9~10월에 연다. 영남일보는 낙동강전투의 중요성과 의미를 되새기고, 전쟁의 교훈을 기억하고자 4차례에 걸쳐 낙동강 전투를 재조명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1 낙동강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 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일명 ‘부산 교두보’라고 했으며, 또 워커 장군이 설정한 최후방어선이란 의미에서 ‘워커 라인’이라고도 했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설정됐다. 남쪽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현풍·왜관·낙동리까지 160㎞, 낙동리에서 동쪽으로 영덕까지 80㎞로 총 240㎞에 달하는 선이다. 1950년 7월말로 시간과 공간의 싸움인 지연작전을 마감하고 8월1∼4일 낙동강선 방어작전으로 전환함으로써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고수냐 죽음이냐

북한군은 소백산맥을 돌파중이었고, 곧 낙동강으로 진출하려던 참이었다. 미 1기병사단의 주력과 27연대는 영동과 영동 동북방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상당수의 적이 이를 우회 또는 포위중이었고, 서측방으로 기동하는 북한군을 미 24사단이 효과적으로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앞으로의 전황을 예측하기 곤란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7월27일 맥아더 장군은 참모들과 함께 전선 시찰차 대구로 와, “8군은 현진지를 고수해야 하며 한국판 덩케르크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맥아더 장군의 확고한 의지를 파악하게 된 워커 장군은 사수훈령(Stand or Die)을 하달했다.


◆북한군의 호남 우회기동

7월3일 한강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4일에는 수원을 점령하고, 북한군 3·4사단은 계속 경부국도를 따라 남하했으나 뒤따르던 6사단은 천안을 지나면서 잠적했다. 7월20일 미군의 항공정찰 결과 군산~전주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대규모 병력을 발견했으나 다음날부터 우천으로 인해 정찰기 운용이 불가능해 북한군의 이동을 추적하지 못하게 됐다. 당시 미 8군에서는 현재 전주방향으로 진출하고 있는 부대를 대전전투를 치른 북한군 4사단의 일부병력이 호남지역으로 우회하는 것으로 오판하고 적이 계속 남하한다면 25일쯤에는 진주까지 진출할 것으로 판단했다.


◆미 25사단 마산에 투입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상주방면의 미 25사단을 마산지역에 투입키로 결정했다.

이는 정면의 북한군 15사단과 3사단이 많은 전투력 손실로 인해 압력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국군 사단은 배치지역과 기동력으로 봐 마산까지 투입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데 비해 미 25사단은 낙동강방어선 내부의 교통망을 이용할 수 있다는 구비조건을 갖고 있었던 점도 워커 장군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미 25사단은 240㎞의 거리를 36시간만에 성공적으로 이동, 마산 정면에 8월3일 도착함으로써 부산을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워커 장군이 위기상황에서 전장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조치할 수 있었던 것은 1·2차 세계대전시 참전해 쌓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

상주에 주둔하던 미 25사단을 마산으로 차출한 워커 장군은 공백을 없애고 낙동강이라는 천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해 적을 저지하기 위해 8월1일 전 부대에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토록 명령, 한국군과 미군 전부대는 낙동강선으로 철수하고 새로운 방어진지를 점령해 8월4일부로 낙동강방어선이 구축됐다. 낙동강방어선은 적의 진출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며, 장차 작전의 주도권을 탈취해 전세를 역전시켜야 할 반격의 도약대였던 셈이다. 이 방어선의 장점은 개전이래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서로 전선을 연결할 수 있어 상호 협조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과 방어선 서쪽의 낙동강과 북측의 횡격실 고지군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방어지대일 뿐 아니라, 부산을 중심으로 잘 발달된 철도와 도로망을 이용한 보급 및 예비대의 전환배치 가능 등이었다.


◆대한민국을 있게 한 낙동강방어선

당시 낙동강방어선은 자연적, 군사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 선을 군사적으로 안정시켜 이른바 부산교두보를 방어하는 것은 한국의 영토적 실체를 보존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방어선의 주요전투 중 영천지구에서 최초로 북한군에게 패하자 미국은 ‘뉴 코리아(New Korea)’ 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 62만명을 서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 제도에 재배치해 새롭게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육군 제2작전사령부 관계자는 “낙동강선 방어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6·25전쟁의 전환점이자 세기의 도박이라고 하는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라며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이 계획했던 망명정부를 승인했다면 대한민국의 영토가 태평양 한 가운데의 작은 섬 사모아로 바뀔 수 있었다. 낙동강선 방어작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임성수기자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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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경북본사 1부장 임성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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