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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10 ·<끝>] 마지막 영화 ‘수선화’…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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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잡지 발표한 시나리오 ‘처녀호
영화 제작 앞두고 ‘수선화’로 제목 바꿔
주변의 염려·만류에도 밤낮없이 몰두
손 쓸 수 없을 정도의 건강 악화로 타계
조감독들이
- 2019-10-30 07: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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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9] 네번째 영화 ‘애련송’
- #1. 다시, 새로운 인연
김유영이 최종 심사에 참여했던 동아일보 ‘영화소설현상공모’에서 거의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최금동(崔琴桐)의 ‘환무곡(幻舞曲)’은 ‘애련
- 2019-10-23 08: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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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8] 출옥, 그리고 다시 영화에 전념하다
- #1. 카프의 해체, 뒤이은 전향
김유영이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35년 6월, 카프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즉 해산이냐 유지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사실 카프는
- 2019-10-10 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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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7] ‘신건설’ 사건과 전향
- #1. 카프의 외곽단체 극단 신건설
1933년 말에 구인회(九人會)를 나간 김유영은 카프로 돌아갔다. 그의 복귀 소식은 1934년 5월2일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영화제작연구소
- 2019-10-02 07: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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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6] 구인회 활동과 탈퇴, 그리고 카프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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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다
1933년 9월15일, 김유영을 중심으로 이종명(李鍾鳴·소설가), 정지용(鄭芝溶·시인·1902~1950), 이태준(李泰俊·서정적 단편소
- 2019-09-25 08: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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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5] 구인회, 새로운 단체의 결성
- #1. 한계에서 벗어나 지경을 넓혀라
김유영이 절감한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한계는 크게 세 가지였다. 카프와 비(非)카프의 불화,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 2019-09-18 07: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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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4]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 1931년 동아일보에 ‘영화가…’ 연재
노동자·농민 결속, 뉴스릴 촬영 주장
논문·평론 등 담은 ‘시대공론’도 발간
1932년 ‘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 발표
대다수 농민위한
- 2019-09-11 08: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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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3] 영화 ‘화륜’과 날선 논쟁
- #1. 카프와의 결별 그리고 서울키노 정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로부터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해산하고 카프 영화부로 가입하라는 권고가 내려왔지만, 김유영은 단호히 거
- 2019-09-04 07: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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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2] 두 번째 작품 ‘혼가’ 그리고 신흥영
- #1. 서울키노, 그리고 영화 ‘혼가’
1928년 5월31일, 중외일보에 묵직한 어조의 기사가 실렸다.
“유랑을 영화화하여 새 경향을 보여준 ‘조선영화예술협회’는 새로운
- 2019-08-28 07: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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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1] 영화에 빠진 구미의 소년, 그리고 ‘
- ◆시리즈를 시작하며= 일제강점기 고통받는 조선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천재 영화감독’. 32세 나이로 요절한 구미 출신 김유영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영화감독이면서 시나리오
- 2019-08-21 07:3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