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혹은 열일곱쯤 되는 소녀가 목화밭을 걷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코라. 불룩한 참마 자루를 들고 있는 코라 곁에는 또래의 소년 시저가 있다. 그들은 키 큰 목화 줄기 사이로 움직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든 밤이다. 대농장의 목화밭을 절반쯤 지난 뒤에 불현듯 그들이 뛰기 시작한다. 불가능한 속도로 너무 빨리 달려 어지러움을 느끼지만, 목화밭을 지나 목초지를 가로질러 늪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계속 달린다. 그들을 달리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곧 추적대가 올 것이며, 잡히게 되면 대농장으로 끌려가 온갖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명백한 사실이 주는 두려움.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주관적인 망상이나 착각이 아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살아오는 내내 그들이 겪은 일들이 심어 준 두려움이다. 얼마 전만 해도 코라는, 농장주와 부딪쳐 그의 옷에 와인 한 방울이 튀게 했다는 이유로 무참히 얻어맞는 어린 체스터를 보호해 주려다가 자신이 매를 맞아 눈가가 터지기도 했다. 물론 이 정도는 약과였다. 그녀가 보아 온 일들에 비하면.
남자들이 나무에 매달려 독수리와 까마귀 밥이 되고, 여자들은 아홉 가닥 채찍에 살이 벌어져 뼈가 드러나도록 맞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몸이 장작더미 위에서 타들어 가고, 도망가지 못하게 발이 잘리고,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손이 잘리는 것을 그녀는 보아 왔다. 그녀가 보지 못한 일들도 있다. 그녀 역시 열네 살 때 겁탈을 당했지만, 농장주가 연인들 사이를 침범하고, 때로는 부부간의 의무를 이행하는 적절한 방법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혼 첫날밤의 부부를 찾아가 신부를 ‘맛보고 생채기를 내고 제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는 것’ 등을.
고대나 중세의 이야기가 아니다. 판타지도 아니고 SF도 아니다. 소녀와 소년이 지나온 대농장의 목화밭은 미국 조지아 주에 있다. 플로리다 북쪽에 붙은 주다. 때는 1800년대 전반. “현상금 30달러. (중략) 위 소녀를 넘겨주거나, 위 소녀가 주 내 어느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는 이에게 상기 현상금 지급. 누구든 위 소녀를 숨겨주는 것은 규정된 법률 위반임을 미리 경고함”(아래 책, 20쪽)과 같은 현상 수배가 합법적이던 시대다. 이러한 법이 소녀와 소년, 그리고 그 가족들, 마을 주민들에게 위에 말한 온갖 짓들을 해도 좋다고 규정했다. 그들은 노예, 미국의 흑인 노예다. 2016년에 출간되어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고 2017년에는 퓰리처 상과 앤드루카네기메달, 아서클라크상을 수상하였으며,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를 ‘타임’지가 선정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올려놓은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증언하는 이야기다. 2016년의 소설이 흑인 노예 문제를 다루었다니,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소설이 미국 전역에서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도 언뜻 이해가 안 된다. 1865년 수정헌법을 통해 노예 해방이 공식화되고 15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흑인 노예 문제를 다룬 소설이 나오고 그 소설에 미국 사회가 위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생각해 본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건조한 소설이다. 소설이 맞나 싶을 만큼 그렇다. 등장인물들을 그리는 데 있어서 감정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냉정하지는 않다. 인물을 제시하고 그들이 빚는 사건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실제 자체를 말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퓰리처 수상작이라니 논픽션인가 하고 생각될 정도다. 작품 제목에 쓰인 지하철도가 도망 노예를 탈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실제 철도였나 보다 생각이 들 정도다. 흑인 노예를 구출해 주려는 사람들의 점조직을 그렇게 불렀을 뿐, 지하에 터널을 파고 레일을 깔아 실제로 기차를 움직였던 것은 아니란다. 역자 황근하의 이러한 지적이 없다면, 그 넓은 미 대륙의 지하에 흑인 노예를 위한 철도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착각할 만큼 이 소설은 실재감을 준다.
이러한 처리, 작가 스스로 그리고 서술자의 서술에 있어서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이러한 서술 방식을 택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이 소설이 보이는 사건들 자체가 너무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이 끔찍함에 공명하기 시작하면 대단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도리가 없고, 농장주나 노예 상인, 노예 사냥꾼, 순찰대 등을 그리는 데 있어서 비판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밋밋해도 ‘인간극장’식의 감정 드라마가 될 것이고, 목소리에 힘을 주면 교설적인 계몽문학 혹은 지나간 역사를 들춰 손쉽게 비판을 해대는 깊이 없는 고발문학 정도가 될 것이다. 만약 이랬다면 서술되는 사건이 서술 행위에 가려져 빛을 잃게 된다. 흑인 노예들이 겪었던 끔찍한 참상이 그대로 끔찍하게 느껴지도록, 작가는 논픽션처럼 보일 만큼 건조한 소설을 써 냈다.
이 소설이 미국의 평단과 출판계, 독서 시장에서 호평을 받은 데는 작품이 성취해 낸 이러한 특성이 주효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흑인 노예들의 상황과 그들을 다루는 미국 사회 제도의 역사에 대한 작가의 폭넓고 치밀한 취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정부 소유인 흑인들을 교육시키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되 실제로는 공중 보건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종적인 관리를 시행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상황이나, 흑인 노예에 대한 주 정책이 바뀐 뒤 기마단원들이 사람들의 집을 무차별적으로 수색하여 숨어 있던 흑인 노예를 찾아 공개 처형한 뒤 그들의 시체를 길가에 죽 걸어놓고는 자유의 길이라 부르는 등 사회 공동체 자체가 전체주의적인 소굴로 변화해 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상황 등을 제시해 주는 것이 그러한 탐구의 결실이다. 흑인 노예 제도를 가능케 했던 조직원들과 그러한 상황에 맞서 도망 노예를 돕고자 했던 지하철도 조직원들을 생생하게 복원한 것 또한 작가의 연구 결과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이렇게 역사에 대한 탐구를 내용상의 기초로 하고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서술을 형식상의 방법으로 하여, 흑인 노예의 상황을 리얼하게 복원해 준다. 이 소설의 주제효과는 주인공 코라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신분은 노예이되 정신은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 해당한다. 탈출 권유를 받던 소녀 시절에 이미 ‘머리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59쪽)를 알고 있던 그녀지만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던 코라가 글을 배우고 역경을 겪으면서 슬슬 제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녀를 끊임없이 쫓던 노예 사냥꾼 리지웨이에게 끝내 붙잡혔을 때 “계속 이유 타령이네요. 다르게 부르면 달라지는 줄 아는지. 하지만 그런다고 사실이 되지는 않아요”(248쪽)라고 진실을 당차게 말할 수 있게까지 된다. 말을 할 수 없었던 존재가 말을 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 사회 내에 인간으로서의 자리를 얻지 못했던 존재가 말을 함으로써 자신 또한 인간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단순한 흑인 노예 소설을 넘어서게 된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뜨거운 호응을 받게 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흑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말을 잃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상황을 강력히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 말을 한다 해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이들, 자신의 처지와 상황, 주장을 사회적 언어로 부각할 힘이 없는 그런 취약계층들, 억눌린 자들, 소외된 자들은 우리 사회에도 널리 존재한다(조문영,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 21세기북스, 2019). 이들 모두 사회에서의 발언권을 잃었다는 점에서 코라의 후손이라 할 만하다.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사랑받게 될 것 같다. 물론 반대여도 좋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있는 코라의 후손들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도 좋겠다는 말이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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