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일의 기쁨과 슬픔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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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3 07:47  |  수정 2020-09-09 14:33  |  발행일 2019-12-13 제16면
[문화산책] 일의 기쁨과 슬픔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어제는 회사를 그만두려 했었다. 회사 앞으로 지나가는 3호선에는 T항공의 광고가 붙어있는데 걸핏하면 ‘대구에서 떠날 때’라고 부추긴다. 상사의 질책을 받은 날은 더 심하다. 결재판을 들고 튕겨 나온 차림 그대로 조금 전 봤던 T항공을 타고 후쿠오카 온천물에나 뛰어들고픈 충동을 느낀다. ‘사무실 옆 항공사 광고가 퇴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써 그 포상금으로 세계여행을 떠나는 야무진 꿈도 꾼다.

어떤 날은 퇴근길 운전을 하다 팥빙수가 먹고 싶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질 때도 있다. 남원 실상사 맞은편 한옥집 팥빙수를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다음 여름엔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며 펑펑 울기도 했다. 뭐도 풍년이라는 말은 딱 이때 쓰는 말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녀별 여성의 고용지표’에 따르면 대구지역 워킹맘이 올해 들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 가장 많이 퇴사를 고민한단다. 통계에서 보듯 아이 때문에, 치사해서, 힘들어서 죄다 그만두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난 또 턱도 없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워킹맘 표본으로 대구박물관에 이 몸이 전시될 것이며, 가장 능력 좋고 미모도 출중하고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다고 역사는 날조될 것이다. 원래 못난 자식이 가문 지킨다고 남은 자가 기록하는 게 역사 아닌가.

일터에 복직할 때를 생각해보자.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사자성어를 품고 일터에 온다.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원래의 취지는 잊고 중간에 생기는 사적이고 잔잔한 갈등에 무릎을 꿇는다. 공적인 도움이 없으니 사적인 부분이 더 충돌하는 건 맞다. 그렇다고 다들 일을 그만두면 누가 남아서 이 현실과 싸우고 제도를 개선하나. 여성이 일을 지속할지 결정은 흡사 도박판과 같다. 일을 한다고 아이가 공부를 못하지도 않으며 집에서 엄마가 지킨다고 공부를 더 하지도 않는다. 이럴 때 외치는 말이 있지. 영화 속 대사처럼, 묻고 더블로 가! 현재를 베팅해 어떻게든 두 배로 돌려받을 내 인생 투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포트폴리오 서문만 들려드릴까. 말년에 남태평양 아일랜드에서 모히또 한잔 받는 풍경에서 내 영화는 시작된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요즘 인기다. 상사에게 찍혀 월급을 회사포인트로 받는 광경이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딱딱한 무생물인 일에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날의 검이 있다. 이를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일이 보람이 되기도 하고 죽을 맛이 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한발 물러나 더 멀리 보는 동지들을 보고 싶다. 만날 고민하는 내 옆자리 동료에게도 하고픈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 글은 T사의 지원을 받고자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는 관계로 며칠 전 결재에서 심하게 야단친 우리회사 높은 분의 협찬으로 제작됐음을 알린다. 나는 버틴다. 아일랜드 갈 때까지.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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