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눈 오는 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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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6 08:18  |  수정 2020-09-09 14:36  |  발행일 2019-12-06 제16면
[문화산책] 눈 오는 날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눈을 보고 싶은 날이 있었다. 몬탁으로 가는 길.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예약해 둔 차를 몰아 4시간을 가면 대서양에 닿을 수 있다. 아님 롱아일랜드 끝으로 가는 기차는 오전 7시. 롱비치행 열차를 타고 자메이카역에 내려 몬탁행 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환승시간이 4분 밖에 되지 않아 영화에서 보듯 숨차게 뛰어야 한다.

이터널 선샤인.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이 기차에서 만난다. 연애 한번 안 해 본 것 같은 더벅머리 총각 조엘은 적극적이고 쾌활한 파란머리 클레멘타인에게 끌렸고 이 둘은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는 집착과 오해가 달라붙는다. 조엘은 자유분방한 클레멘타인의 행동을 오해했고 상처받은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지운다. 달라진 클레멘타인에게 충격받은 조엘도 기억을 지우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 자신의 기억을 지운다. 사랑했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 그리고 아팠던 기억까지.

대서양의 시작 몬탁을 가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이 영화 때문이었다. 실제로 가보면 한국인 여대생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날 아침 기차표를 취소하고 예약해둔 차마저 취소했다. 맨해튼에 내리는 눈과 함께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날 숙소 맞은편 피자 가게의 점원은 나를 동양의 여중생쯤으로 봤는지 너는 돈을 가져왔냐고, 돈부터 보자는 농을 했다. 도시를 당장 떠나고 싶어 몬탁행 기차를 끊었는지 모른다. 영화에서처럼 나쁜 기억을 지우고 행복한 여행을 하고픈 판타지 같은 게 당시의 내겐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눈이 펄펄 날렸다. 멀리 성공녀의 대명사 도나카란 패션숍이 보였고 지하철 개찰구 쪽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빨려들고 있었다. 다들 싸우는구나. 먼 바다를 품더라도 지금은 마주치는구나.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눈이 머리 위에 내리는데 밤새 데워진 숨을 식히듯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돈부터 보자 했던 바로 그 가게에 들어갔다. 중국인 혼혈인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남자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원래 차별받았던 사람이 다음 약자가 나타났을 때 더 차별하는 법이다. 그는 통상적인 아침 인사를 했다. 나도 굿모닝. 잉글리시 머핀 세트를 시키고는 어제 저녁 너는 내게 무례했다고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말했다.

구하라, 설리, 또 성남어린이집 그 여자아이. 이들에게 무례했던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도시에 남아 싸워야 한다. 기억을 지우는 기계 따윈 애초에 없다. 그런 기술도 없는 주제에 사람에게 너무 함부로 하고 있진 않는가. 곧 첫눈이 내릴 것이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싶지만 먹다만 머핀만큼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싸워줄지, 그 방법은 여전히 고민스럽다. 잘 가요, 구하라와 설리. 우리는 이 도시에 남아 싸워볼게요.

서상희(크레텍책임 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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