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정점식 ‘콜라주 B’(2003)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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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39면   |  수정 2020-09-08
자유롭게 그은 선,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신문지…뒤엉킨 단풍잎처럼 콜라주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정점식 ‘콜라주 B’(2003)
정점식, ‘콜라주 B’, 캔버스에 유채, 59.5X71.5cm, 2003년.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정점식 ‘콜라주 B’(2003)

낙엽이 깔린 교정을 걷는다. 대학시절 풋풋한 고민을 안고 수없이 거닐었던 교정에서 나의 은사 극재(克哉) 정점식 선생(1917~2009)을 그려본다. 극재도 지금의 나처럼 이 교정에서 예비 화가들을 가르치며 자신을 담금질했으리라.

극재의 화집을 펼쳐보다가 ‘콜라주 B’에 눈길이 갔다. 신문지가 책갈피 속의 단풍잎처럼 끼워져 있는 말년의 작품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겹겹이 칠하며 깊이를 더하고 나이프로 거칠게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화면의 중심과 아래쪽에 신문지를 붙여서 조형적인 변화를 꾀했는데, 그것이 제목이 되었다.

극재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성주에서 태어났다. 38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1941년 졸업과 동시에 만주 하얼빈으로 간다. 그리고 8·15광복 이듬해인 46년에 귀국하지만 기쁨도 잠시, 50년 6·25전쟁으로 다시 암울한 시대를 맞는다. 53년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하고, 55년 대구미술가협회를 발족한다. 64년에는 계명대 미술대학을 창설하고, 평생 대구지역을 지키며 현대미술의 활성화에 앞장섰다.

극재는 또한 비평의 불모지였던 전후(戰後) 대구화단에서 신문지상을 통해 국내외 미술의 흐름과 미술의 동향에 관한 글을 썼다. 대구의 현대미술이 1970년대의 역동적인 추상미술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극재의 적극적인 뒷받침과 비평적 활동이 한몫했다. 또 전시회 서문 작성을 통해 동료 교수나 제자들을 응원하며 일반인들에게 미술을 알렸다. 극재의 글쓰기는 건조한 논고 형식이 아니라 같은 작가로서의 안목과 체취가 배어 있어서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여운이 있었다. 시인 김춘수가 ‘출중한 문장력을 가진 화가’로, 평론가 유준상이 ‘문체의 사상가’로 극재 선생을 평가했듯이 극재 선생의 문장에는 그만의 매너가 있었다.

“화가라면 누구나 흰 캔버스의 침묵의 긴장을 깨뜨리는 붓의 터치나 타슈(Tache, 얼룩)의 흔적에 대해서 이따금 매혹을 느낀다. 그림은 비형상의 화면공간, 그 자체로써 하나의 소우주로 엮어 나가는 작업이다. 나는 항상 예기치 못한 것을 찾고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캔버스에 표현하려 한다.”

극재의 이 말처럼 ‘콜라주 B’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콜라주(Collage)’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등나무가 있는 정물’로부터 시작된다. 캔버스에 그림의 소재를 그리지 않고, 직접 가져다 붙이는 방식인 콜라주는 표현의 영역을 그만큼 확장한 획기적인 시도였다. 피카소가 문을 연 콜라주 작품은 신문지나 악보, 천, 종이, 철사 조각 등을 붙이는 입체주의 작가들의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지금은 일반적인 조형요소가 되었다.

극재의 작품에도 콜라주 작품들이 적지않다. 이런 콜라주 작품은 초기에는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면모가 강했다면, 후기에는 콜라주의 형상이 비교적 자유로운 서정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2003년에 제작한 ‘콜라주 B’에는 신문지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극재는 우선 캔버스에 물감을 여러번 칠한 다음 마르지 않은 상태에 종이를 눌러 닦아내거나 나이프로 물감을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안쪽에 있던 색채를 드러내면서 깊이를 조성한다. 여기에 신문지를 붙여서 조형적인 변화를 부여했다. 그리고 나이프로 그은 거친 선들이 역동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가운데, 신문지들이 색채와 행위가 균형을 맞추며 고요하게 자리잡았다.

가을이기 때문일까. 회색톤에 깔려있는 붉은색이 거리에 뒤엉킨 단풍잎 같아 더 눈여겨보게 된다. 극재가 자유롭게 그은 선이나 콜라주는 그가 살아온 격동의 시기를 깊이 껴안는 것처럼 보인다.

1958년 극재의 3회 개인전 평에서, 평론가 정규는 “현대적인 형식으로서 표현된 정점식의 이미지는 대단히 소박한 원시적인 목가를 연상케 한다”라고 했다. 이는 극재가 현대적인 형식을 추구하되 한국의 전통적인 뿌리의식을 조형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지적은 극재 선생의 일생을 통해 꾸준히 심화된다.

미술사가 김인혜는 극재를 평가하기를 “1930년대의 유산에 허덕이는 대구화단을 쇄신한 작가이자, 구상화단이 그때나 지금이나 강한 대구지역에서 ‘추상화계’의 대부로 인정받고 있다”라고 했다. 극재는 화가이자 비평가, 훌륭한 교육자였다. 작업과 미술이론의 병행은 쉽지 않은데, 극재는 그것을 지행합일의 자세로 수행하였다.

때마침 계명대 행소박물관에서 ‘다시 보는 극재 정점식의 예술세계’라는 타이틀로 특별전이 11월5일부터 2020년 1월25일까지 열리고 있다.

나는 내 마음에, 작품속의 신문지처럼 깊이 콜라주된 극재를 생각한다. 누렇게 물든 메타세쿼이아나무 같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며 나도 가을이 된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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