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힐링 ‘茶와 야생초’ 동화속 궁전 가는길 ‘핑크뮬리’ 작가들의 ‘만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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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35면   |  수정 2020-09-08
■ 만추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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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의 첫 핑크뮬리 명소가 된 경주 첨성대 언저리.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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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 다도인인 오영환 <사>푸른차문화원장의 만추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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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가장 오지 중 한 곳인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에서 23년째 만추를 맞고 있는 김일환 화가의 만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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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사진작가의 만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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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오 사진작가의 만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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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대표적 정원으로 급부상한 칠곡군 가산면 수피아정원 내 수피아미술관은 핑크뮬리의 명소로 알려져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멀리 공룡의 머리가 보인다.

그가 테라스 안락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감고 가을바람을 품는다. 270도 각도로 밀고 들어오는 최정산 단풍의 진면목. 그 기운을 세포속으로 가져가 새로운 창작욕으로 환치시키고 있다. 시여리 동제미술관 관장과 김길후 작가는 누구보다 비슬산의 사계, 특히 그 방점이랄 수 있는 만추의 빛들을 하나의 ‘유물’처럼 소장한다. 주차장 구석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족히 10가지가 넘는 단풍이 서로 어울려 모자이크 미학을 피워낸다. 낙엽이 이렇게 훤할 수 있단 말인가. 김길후의 블랙은 계절이 없다. 모든 계절을 블랙홀처럼 다 잡아먹은 탓이다. 하지만 그의 어둠을 오래 들여다 보면 향 냄새가 피어난다. 낙엽 타는 향기였다. 그의 얼굴 또한 만추였다. 전시장 앞에 핀 팜파스그래스, 그리고 자작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미술관의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오영환 푸른차문화원장의 ‘뜨락’
4개 연못 거느리고 덩굴식물이 감싸
야생초 군락, 마음 내려놓는‘하심방’
바람은 낮춘 마음 뿌리 뽑지 못하고∼


대구 수성구 연호네거리 근처에 있는 오영환 <사>푸른차문화원장의‘뜨락’을 찾았다. 연호지 등 무려 4개의 올망졸망한 연못을 거느린 곳에 위치해 있다. 오 원장은 화원과 식물원에서 봄직한 화려하고 풍성하고 알록달록한 식물은 가급적 멀리한다. 무명초를 더 아낀다. 담쟁이덩굴, 마삭줄, 백화등, 아이비, 인동초 등 덩굴식물 5인방이 노출콘크리트조 건물 전면부를 빼곡하게 감싸고 있다. 시조시인 문무학의 팔공산 집에서 입양 온 앙증맞은 쑥부쟁이가 호젓한 정원 오솔길에 드문드문 앉아있다.

그녀에게 이 만추지절은 뭘까. ‘춘하절에 기세등등하게 수직으로 치솟던 산하의 기운이 겸손하게 수평으로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이라고 풀이한다. 그녀가 말차를 달여낸다. 그리고 3일간 장작불에서 생긴 재 속에서 3일간 갈무리된 재두부를 초콜릿처럼 썰어 발그스름하게 물든 감잎 위에 다식으로 올려놓는다. 가끔 위세등등한 정치인 등이 방문을 하면 충혈된 맘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하심방(下心房)’으로 안내한다.

바닥은 군불 땐 토방처럼 훈훈하다. 메주 띄우는 방처럼 쿰쿰한 향기가 감돈다. 한 명 앉으면 딱일 것 같은 정방형 흙방. 가로 120㎝, 세로 60㎝ 하심창을 잠시 열었다. 영하권에 근접한 냉랭한 바람이 들이친다. 서쪽 벽은 통유리창. 갓 따온 꽈리 열매를 실에 매달아 두 줄로 걸어놓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300여종의 야생초급 식물이 춤을 춘다. ‘잡풀삼매경’에 잠시 빠져본다. 하심방은 생로병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녀가 뜨락에 나가 억새, 말라버린 댓잎, 남천 열매, 쑥부쟁이, 황국 등을 꺾어 위클리포유의 만추로드에 걸맞게 세팅을 해준다. 최근 출간한 그녀의 시집 ‘사질토 분청찻잔’도 그 옆에 놓으니 구색이 딱 맞다. ‘바람은 낮춘 마음 뿌리 뽑지 못하고~’, ‘백두산 구절토’란 시의 한 구절을 위해 차를 또 마셨다.

핑크뮬리의 급습
벼와 사촌뻘, 꽃 이삭이 쥐꼬리와 닮아
경주에서 신드롬, 최강 포토존 첨성대
수피아미술관 정원 아이들에 인기 최고

오후 4시. 수성못 동쪽 테크형 산책로도 만추의 춤을 추고 있다. 특히 잘 심긴 수생식물군이 눈길을 끈다. 갈대, 억새, 강아지풀보다 더 큰 수크령, 그리고 부들. 그 곁에 ‘가우라’로 불리는 나비바늘꽃이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린다. 못의 서쪽 구역에는 코스모스 구간이 있는데 지금은 지고 없다. 못 주변은 벚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백일홍, 은행나무 등이 억새·갈대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남쪽 구역에는 여느 것보다 키가 훨씬 큰 억새가 음악분수처럼 일렬로 도열해 라인댄싱을 추고 있다. 멀리 SK리더스뷰아파트군이 억새 사이로 병풍처럼 서 있다. 밤이 되어도 그 포인트에 서면 경관 조명 때문에 낮과 비슷한 감도를 보여준다. 심야의 억새가 그린 만추화 한폭을 사진으로 또 포착했다.

최근 코스모스가 이 식물 때문에 체면이 팍 구겨졌다. 5년 전 등장한 핑크뮬리다. 지난해 전수조사 결과 축구장 14배 크기의 면적을 갖게 됐다. 핑크뮬리 때문에 영광 불갑사와 선운사 언저리의 꽃무릇의 인기까지 차츰 식고 있다.

보는 이의 맘을 동화속 궁전으로 데리고 가는 핑크뮬리. 벼목 벼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벼와 사촌뻘이라 할 수 있다. 우리식 이름으로는 ‘분홍쥐꼬리새’인데, 꽃 이삭이 쥐꼬리를 닮은 풀이란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분홍억새, 서양억새 등이 있다.

이 놈이 최강 포토존으로 급부상했다. 경주 첨성대 등 동부사적지 근처는 핑크뮬리 군락지 덕분에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엄청난 관광객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핑크뮬리가 첫 자태를 선보인 곳은 2014년 제주도. 그해 4월 양지선 제주 휴애리자연생태공원 대표가 국내에서 선두적으로 핑크뮬리를 보급하게 된다. 순천만 국가정원이 2016년 단지를 조성한다.

2017년 경주가 대한민국 핑크뮬리 신드롬의 발원지가 된다. 핑크뮬리 인증샷이 SNS를 점령하게 된다. 김종원 경주시청 사적관리과 팀장이 식재를 주도한다. 핑크뮬리는 절정의 핑크빛을 발산해야 되는데, 그건 김을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 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파가 들끓었다. 소문을 듣고 뒤늦게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군락지를 조성하고 있다. 대구의 경우 대구스타디움 도로변 등에도 심겨 있다.

지난 5월1일 오픈한 칠곡군 가산면 가산 수피아정원 내 수피아미술관. 거기도 올해 핑크뮬리 때문에 난리가 났다. 수피아정원은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 경북도 제4호로 등록된 전국 최대 민간정원(4만평)이다. 몸길이 42m의 국내 최대 인조공룡 브라키오사우르스도 만날 수 있다. 초대형 빈티지 그라운드카페와 50년생 왕벚나무길 300m가 만추와 단짝이다.

미술관 옥상에도 핑크뮬리를 심어놓았다. 근처 화장실에는 억새존. 멀리서 보면 핑크뮬리와 억새로 만든 빵모자를 쓰고 있는 형국이다. 미술관 앞 연못, 그리고 그 옆의 벚나무길도 만추지경을 느끼기에 딱이다. 이 미술관은 어른보다 어린이를 위한 갤러리로 출발했다. 첫 기획전 주제는 ‘어른들도 누구나 어린이였다’. 2회 기획전은 6각형 블록을 개발한 김계현, 초식동물만 그리는 정성원, 펄산수화로 유명한 이은지, 흙의 정령을 가진 김지아나, 엄마의 노랑봉지로 유명한 이연숙 등 7명의 작가를 초대해 ‘판타스틱 유토피아’를 깔았다. 모두 아이가 좋아할 만한 주제다. 1층 전시장 중심에 노랑종이숲을 만들어놓았다. 이것도 가을 오브제 같다. 아이들은 마냥 즐겁다. 멀리서 감상만 하는 미술관이 아니고 만지고 뒹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와 가을
대구서 첫 가을소리 듣는 김일환 작가
황량하면서 을씨년스러운 가을 끝자락
사진작가 이만도·우재오의 만추 프레임


입동인 지난 8일 아침 안동에서 올해 첫 얼음이, 대구에서는 첫 서리가 관측됐다. 봄·여름 산하에 걸렸던 그 광활한 녹색의 커튼은 일시에 만장(輓章)으로 펄럭거린다.

대구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박혀있는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대구의 강원도 산골로 불린다. 1996년부터 청도 팔조령과 맞물린 거기에 작업실을 마련한 김일환 화가. 그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홍시는 그만의 해장용이다. 만취 다음날 그는 그것으로 속을 푼다.

지난 13일 화가의 집을 찾았을 때 감나무에 매달려 있던 잎은 모두 떨어져 버렸다. 앙상한 가지에 잉걸불처럼 매달린 감이 대낮에도 어둑한 상원골의 가로등 구실을 한다. 모두 8가구가 살고 있다. 7가구는 모두 타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국도에서 좌회전, 거의 6㎞ 이상 들어와야 된다. 가로등이 부실해 초행인 사람은 심야에 찾아가기 어렵다.

2층 작업실 난간 앞에 서면 화엄경처럼 펼쳐진 참나무의 단풍군. 앙상한 돌배나무. 집 오른편 대숲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극채색의 단풍 몇 그루가 손바닥 넓이만큼 기대서 있다.

그의 도록에서 만추 사진 두 장을 골랐다. 황량하면서도 을씨년스러운 정결한 만추화였다. 사진작가 이만도·우재오가 만추 사진을 보내왔다.

보일러 물이 돌지 않는 가난의 방바닥이 지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냉골의 방에 단풍의 훈기가 돌기를…. 그걸 바라는 자선냄비의 붉음도 결국 만추형 아닌가.

김정용 시인이 제일 늦게 ‘홍옥’이란 글 한 편을 보내왔다. 잃었던 추억의 그림이 첫눈처럼 어른거렸다. 그 서두 한 구절을 만추로드의 끝문장으로 대신한다.

‘농익은 홍옥을 나일론 셔츠 소매에 문질러 껍질에 광이 나도록 한 후, 이가 시리도록 한 입 깊게 베어 물었던 시린 늦가을의 맛. 유년에 베어 물었던 늦가을의 맛은 지워지지 않고 입안에 침샘에 고여있다.’

글·사진=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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