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디지털 소외계층도 품어야 한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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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22면   |  수정 2020-09-08
생활전반 무인시스템 확산
디지털 문화 소외계층 생겨
모바일 뱅킹 등 노년층 불편
알기 쉬운 금융교육과 함께
노인 전담창구·도우미 필요
20191122
김병효 국제자산신탁 상임고문

회사 근처에 깊은 맛을 내는 곰탕집이 있어 자주 들르곤 한다. 얼마 전 점심시간에 그 집을 찾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문을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와서 주문과 결제는 무인주문단말기(키오스크:Kiosk)를 이용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지만 무인주문기계에서 메뉴를 고르고 신용카드로 음식값을 미리 내고서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제 생활 전반에 무인시스템이 사람이 하던 업무를 대신 척척 처리하는 디지털시대의 현실을 실감했다. 변화하는 디지털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

몇 년 전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201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라는 영화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히 살아온 주인공은 부인의 병구완에 여윳돈을 거의 다 소진하고 힘들게 살아간다. 그러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하여 일을 계속하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다니엘은 질병수당 수급대상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고 상담을 위해 해당 관청을 찾아간다. 하지만 사전에 온라인으로 신청해야 상담할 수 있다는 직원의 무성의한 응대에 다니엘은 분노한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그는 가까스로 친절한 직원의 도움을 받지만 그 직원은 상사의 질책을 듣는다. 천신만고 끝에 실업수당을 신청하지만 결국 받지 못하게 된다. 건강 문제로 일을 할 수 없는 데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이력서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라는 지침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질병수당 자격심사 항고를 하지만 그날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항고에 대비해서 준비했던 그의 메모가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나는 인간입니다. 개가 아니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절규가 적혀 있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도 급속히 디지털 시대로 변해 간다.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한다.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 공항, 영화관 등 곳곳을 무인단말기 키오스크가 차지하고 있다. 이달 초, 모 항공사는 국내선 공항 카운터에서 탑승권을 발권하면 수수료를 따로 물린다고 했다. 모바일과 키오스크를 활용하여 ‘스마트 공항’을 구현한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지만 무인발권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의 불편이 예상된다. 이렇게 무인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디지털 문화의 소외계층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는 기술 발달이 또 다른 장벽을 만든다. 이 장벽의 바깥에는 노년층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금융도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내 손 안에 작은 은행’을 구현하기 위해 은행들은 사활을 걸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지난 5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8년 모바일 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은행의 모바일 뱅킹 서비스를 최근 3개월 이내에 이용한 60대는 18.7%, 70대는 6.3%에 불과했다. 20대는 76.3%, 30대 87.2%, 40대 76.2%이며 50대도 51%가 이용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모바일 뱅킹 이용도 세대별로 양극화가 심한 실정이다. 고령층은 여전히 창구거래를 선호하지만 은행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비대면 거래를 정책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비대면 거래에 수수료 면제나 우대금리를 주는 추세에 비해 창구거래를 하는 노년층은 이런 혜택도 받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금융권은 미래 고객도 중요하지만 노년층의 금융서비스 권리를 찾아주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알기 쉬운 모바일 뱅킹 이용설명서나 동영상 제작, 직원들의 시연과 설명도 필요하다. 지자체와 협력하여 노년층을 위한 금융교육을 활발히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창구를 찾는 노년층을 위한 전담창구나 도우미를 배치하여 문턱도 낮추어야 한다. 수익만 추구하기보다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 주듯/ 품어야 산다/(중략)/ 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배달하는 여자의 입김으로/ 동이 트듯/ 품는 힘으로 안겨야 산다.” 황규관 시인의 ‘품어야 산다’라는 시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약자를 보듬고 품어야 산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뿐만 아니라 디지털 소외계층도 다 같은 인간이다.김병효 국제자산신탁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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