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11> 주남리 남악정·원리리 광록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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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4   |  발행일 2019-11-14 제13면   |  수정 2021-06-21 18:01
학문연구·후학양성 매진한 갈암과 항재의 선비정신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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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석보면 주남리에 위치한 남악정. 한식기와를 올린 시멘트 돌담과 정면에 우뚝 서 있는 대문채가 눈길을 끈다.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갈암 이현일은 이곳에 초가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 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했던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그는 병자호란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고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은거의 터로 잡은 곳은 영양 석보면 원리리다. 그는 초당을 짓고 후학을 길렀으며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고 전한다. 부인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인 안동장씨(安東張氏)였다.

그녀는 초서의 대가로 평가받을 만큼 서화와 문장에 뛰어난 여인이었다. 부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라고 불렸다. 석계는 영양 석보 원리리 두들마을에 살다 수비로 옮겼고 마지막은 안동 도솔원이었다. 그의 타계 후 셋째 아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과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은 어머니 안동장씨와 함께 석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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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 대문간에 걸린 현판의 글은 숙종 임금의 글씨라고 한다.
 

#1. 주남리 남악정 

 

갈암 이현일이 석보로 와 자리 잡은 곳은 주남리 남악실(또는 남곡)이다. 남악실은 남향의 따뜻한 골짜기, 또는 숲이 우거진 골짜기였다. 그는 2칸 초가를 짓고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 현판을 걸었다. 마을은 남악정이 있어서 남악이라 불렀다고 하고, 정자는 남악에 있어서 남악정이라 했다 한다.

정자 앞은 푸른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수목이 무성하며 푸른 내가 흘러서 고요하고 한적하였다는데 지금도 확연한 것은 고요와 한적함이다. 그는 남악초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길렀다.

이현일은 인조 5년인 1627년 영해에서 석계 이시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장씨부인의 꿈에 오색 무지개가 집에 가득차면서 어떤 대인이 들어와 토끼를 안겨 주며 ‘이것은 하늘토끼’라 말하자 곧 그가 태어났다고 전한다. 14세 때인 1640년에 아버지를 따라 석보면 원리리에서 14년을 지낸 후 1654년에 수비면 신원리에 들어가 띠집을 짓고 여러 형제들과 함께 20여 년간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주남리 남악정
석계 셋째아들 갈암 이현일의 정자
가운데 한 칸 대청 양쪽으로 온돌방
부친상 3년후 건립…여러 차례 중수
대문간 ‘弘道門’ 현판은 숙종 친필

◆원리리 광록정
석계 넷째아들 항재 이숭일의 정자
두들마을 서쪽 언덕 위에 남향 배치
전면 툇마루에 원기둥, 나머진 사각
70년대 석축 쌓고 증축…현재 모습



167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친 뒤 이곳으로 와 초당을 지었다. 이후 초당은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중수되었고 현재는 기와를 얹은 남악정(南岳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대문채에 들어서면 높은 기단 위 처마도리에 걸린 ‘남악초당’ 현판이 올려다 보인다.

남악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한 칸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로 열었다. 툇마루는 전면의 기둥 밖으로 마루 끝을 약간 확장한 후 풍혈이 없는 평난간을 둘렀다. 좌우 온돌방의 대청 쪽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툇마루 쪽에는 두 짝 여닫이 띠살 창문을 달았다.

대청의 배면에는 우리판문을 달았고 마루 위에는 ‘남악정중수기’ 편액이 걸려 있다. 남악정의 기단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3층으로 쌓아 시멘트로 마감했다. 툇마루 아래는 전면과 측면을 모두 시멘트벽으로 둘러쌓아 막고 정면에 십자모양으로 작은 통풍구를 내었다. 주초는 모두 자연석이며, 기둥은 모두 사각형이다. 정면 가운데로 출입하는데 툇마루 아래에 크고 반듯한 디딤돌 하나가 놓여 있다.

남악정은 사면에 한식기와를 올린 시멘트 돌담을 두르고 있고, 정면에 대문채가 서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널판문을 단 중앙 대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고방이 있으며 고방은 안마당 쪽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다. 대문간에는 ‘홍도문(弘道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숙종 임금의 글씨라 한다.

이현일은 남악초당에서 10여 년간 성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산림에 숨어서 살았으나 학이 아홉 길 언덕에서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비록 산중에 있었으나 상감까지 그를 알았다는 뜻이라 한다. 현종 때와 특히 숙종 때 나라에서 수차례 그를 불렀지만 모두 거절하였고 결국 1688년 54세의 노령으로 조정에 나아가 이조판서까지 지냈다.

이현일의 상소 등에 대한 숙종의 회답을 묶은 책 ‘성유록(聖諭錄)’에 ‘칠사이판(七辭吏判)’이라는 말이 있다. 이조판서 사표를 일곱 번 냈다는 뜻이다. 그는 1704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노령의 관직 생활동안 유배도 여러 번, 죽은 뒤 추탈(追奪)과 복권도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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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에 자리잡은 광록정 대청마루에 앉으면 마을 앞 천변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있다. 남쪽 담장을 30㎝정도로 낮게 만든 것도 조망을 위해서다.
 

#2. 원리리 광록정 

 

아버지 석계가 살던 터에 자리를 잡은 것은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다. 그는 인조 9년인 1631년 영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둘째 형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과 셋째 형 갈암과 함께 공부하였고 공명에는 뜻이 없었다 한다.

부친의 타계 후 석보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나갔는데 그곳이 오늘날 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두 줄기의 냇물이 만나니 항재는 동쪽을 낙기대(樂飢臺), 중앙은 세심대(洗心臺), 서쪽은 서대(西臺)라 이름 짓고 소요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두들마을에 가면 항재가 새겼다는 암각서를 볼 수 있다.

이숭일은 석보로 돌아와 옛날 행인이 묵던 광제원(光濟院)을 ‘광록초당(廣麓草堂)’이라 이름 짓고 한가로이 쉬며 학문을 연구했다고 한다. 광록초당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큰아들 유와(兪窩) 이식(李植)이 기와집으로 고쳤다. 이후 광록초당은 점차 퇴락하였고 200년 뒤에는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후손들은 서대 옆에 오랫동안 폐지되어 있던 이식의 사당과 재실을 사들여서 광록초당 편액을 걸었다.

1926년에는 언덕이 무너져 정자의 기초가 불안하자 정자를 한 칸 안으로 들였고 규모도 크게 만들었다. 50년 뒤에는 석축을 쌓고 건물을 더욱 증축했다. 그것이 현재의 광록정(廣麓亭)이다.

광록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를 깔았다. 툇마루의 양 측면에는 판문을 달았고 문 위에는 격자문양의 창을 달았다.

대청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했고 문 위에 좁은 격자무늬 창을 달았다. 자연석을 두 줄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았고 전면 툇마루에는 둥근기둥, 나머지는 사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의 오른쪽에 입구인 사주문이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두 짝의 판문을 달고 맞배지붕을 올린 모습이다.

광록정은 두들마을 서쪽 언덕 위에 남향으로 서서 마을 앞 천변의 풍광을 내려다보고 있다. 남쪽의 담장은 30㎝정도로 낮게 만들어서 정자에 앉으면 전면이 확 트여 있다. 정자의 뒤쪽에는 집들이 빼곡하다.

이숭일 역시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리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62세의 고령에 의령 현감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이불자(李佛子)라 했고 영남안찰사였던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는 ‘영남 70주에 고도(古道)로써 치민(治民)한 자는 이사군(李使君)뿐’이라 했다.

그는 1694년 형 이현일이 종성으로 유배되자 상심하여 낙향하였다고 한다. 이후 몇 년을 아팠고, 병상에서도 후학에게 강론을 계속하다 1698년 68세를 일기로 광록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풀을 베어 집을 지어 몇 년 동안 지내면서/ 옛 산천에 의지하여 초가 한 칸 지었네/ 까마득히 먼 산은 구름과 함께 푸르고/ 작은 연못 맑고 맑아 달처럼 텅 비었네/ 조용히 옛날 떠올리며 삶과 죽음을 슬퍼하고/ 때때로 남겨주신 책을 잡고 부질없이 뒤적이네/ 인간 세상 영고성쇠 나와 전혀 상관없으니/ 평생토록 분수 지키며 나무꾼 어부와 짝하리라.’

이숭일의 광록초당 원운이다. 그의 마음이 보이는 시다. 항재 이숭일이 남긴 명언 중에 ‘진리는 천하의 공인데 어찌 사심이 개입하겠는가’라는 말도 있다. 형인 이현일은 이러한 아우를 두고 ‘천인(天人)의 학문을 연구하고, 나라를 구제하려는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계책을 갖고 있었다’라고 했다.

현재의 광록정에는 옛 모습은 없으나 그 고즈넉한 좌정에 항재의 마음이 면면하다. 곧은 아버지가 있었고 또한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가 있었으니 그들의 깊고도 너른 그림자 위에 아들들은 빛났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영양군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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