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10 ·<끝>] 마지막 영화 ‘수선화’…그리고 32년의 짧은 생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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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30   |  발행일 2019-10-30 제15면   |  수정 2019-10-30
출감 후 만신창이 몸으로 촬영 강행…몇 컷 남겨두고 불꽃같은 삶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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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감독의 고향 구미 고아읍 원호초등학교 뒤편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수선화’의 스틸컷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영화 스틸컷 아래 수선화에 대한 짤막한 설명과 함께 출연진·제작진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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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의 마지막 작품인 ‘수선화’는 1939년 11월20일 첫 촬영에 들어갔다. 그해 11월16일자 동아일보는 영화 수선화의 크랭크인 소식을 실으며 12월 하순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김유영은 영화 촬영 중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 다음해 8월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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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추도 유료시사회’ 소식을 전한 1940년 8월11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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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출신 김유영 감독.
1939년 잡지 발표한 시나리오 ‘처녀호
영화 제작 앞두고 ‘수선화’로 제목 바꿔
주변의 염려·만류에도 밤낮없이 몰두
손 쓸 수 없을 정도의 건강 악화로 타계
조감독들이 완성…두 차례 시사회 가져
사후 7개월만에 경성보총극장서 개봉
이념의식보다 계몽주의적 서사구조 평가


#1.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1937년 10월23일에 촬영을 시작한 ‘애련송(愛戀頌)’이 애초에 계획되었던 일정에서 1년 반이나 늦은 1939년 6월27일에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에서 개봉되었다. 자꾸만 미뤄지는 일정 속에서 김유영은 숱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게다가 아버지 김현묵마저 세상을 떴다. 안 그래도 수감생활로 망가진 김유영의 몸에 슬픔과 고통이 병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장염의 악화였다.

하지만 김유영은 스스로를 더 몰아붙였다. 결국 또 한 편의 시나리오를 지어 1939년 11월 ‘문장(文章)’에 발표했다. 바로 ‘처녀호(處女湖)’였다. 문장은 그해 2월에 창간된 월간 문예잡지로 친일 색채가 거의 없는 높은 수준의 순수문학지(誌)였다. 이때 김유영은 ‘처녀의 호수’라고 풀이할 수 있는 작품 ‘처녀호’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달아놓았다.

‘너무도 급하게 쓰는 바람에 완벽하게 완성하지 못하고 발표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 시나리오는 실제 촬영대본과 큰 차이가 있으며 이익(李翼·예명 김화랑·본명 이순재·작가이자 감독·1912~1976) 군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시나리오는 호수가 있는 어느 양반 마을을 배경으로 흘러갔다. 어느 날 그 마을에 서울 출신의 한 남자가 나타난다.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려온 백 선생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남편을 잃은 류향이가 양자 재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문제는 류향이의 재산을 탐낸 이웃이 그의 아들 재석을 그녀의 양자로 들여보내지 못해 안달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류향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이에 재석의 부모는 류향이와 백 선생이 불륜 관계라고 소문을 퍼뜨린다. 결국 류향이는 견디지 못하고 유서를 남긴 채 호수에 몸을 던지고야 만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뉘우치는 가운데, 백 선생은 홀로 남은 재길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처녀호’는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제작을 맡기로 했고, 감독은 당연히 김유영이었다.

#2.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처녀호는 영화 제작을 앞두고 ‘수선화(水仙花)’로 제목을 바꿨다. 수선화의 꽃말이 자존심과 고결함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제목이었다. 김유영은 영화를 12월 하순에 완성해 이듬해인 1940년 봄에 개봉하기로 계획하고, 1939년 11월20일 의정부의 신장(新裝)스튜디오에서 첫 촬영을 시작했다. 각색에 이익(李翼), 카메라에 황운조(黃雲祚)가 이름을 올렸으며, 출연진은 문예봉(文藝峯), 김일해(金一海), 김신재(金信哉), 김복진(金福鎭) 등이었다.

당시 김유영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극도의 생활고에서 비롯된 영양실조, 단 하루도 그를 내버려두지 않은 극심한 스트레스, 거기에 지병인 신장병까지 겹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김유영은 주변의 염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선화’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지팡이를 잡고, 나중에는 수레에 실려, 급기야는 눈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촬영을 강행했다. 거동을 못하는 상태로 세브란스의전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건강은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국 1940년 1월4일, 김유영은 눈을 감았다. 촬영 장면을 몇 컷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든 영화인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조선영화예술단체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영화는 조감독들이 완성을 했다.

완성된 영화는 1940년 8월9일과 8월13일, 두 차례에 걸쳐 시사회를 가졌다. 이 중에서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국도극장 전신)에서 열린 13일의 시사회는 ‘김유영 추도 유료시사회’였다.

#3. 수선화

시사회를 마친 ‘수선화’는 1940년 8월21일에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수선화를 일러 ‘김유영의 정열과 눈물이 담긴 작품’이라고 평한 안종화(安鍾和·영화감독·조선영화예술협회 창립멤버·1902~1966)는 ‘수선화’의 줄거리를 상세하게 기록해둠으로써 김유영에 대한 우정과 동료애를 드러냈다.

‘김씨 일가가 모여 사는 산천이 수려한 어느 촌락. 물이 맑은 마을 앞 호숫가를 혼례 일행이 지나간다. 말을 탄 신랑은 열세 살 된 김씨 문중의 외독자이고, 사인교 속의 신부는 열일곱 살 된 유씨였다. 그러나 어린 신랑은 불과 2년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월이 흘러 20년 후, 시모와 더불어 쓸쓸히 집안을 지키던 유씨는 외로움에 견디다 못하고 먼 친척으로부터 동길을 양자로 데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길의 종형(從兄)이 서울에 있는 친구 백 선생을 불러 마을의 소학교를 운영하게 한다. 그 소학교는 유씨의 시아버지가 세운 사립학교였지만 그가 죽은 후로는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방치된 상태였다. 마을에 나타난 백 선생은 동석의 집에 짐을 푼다. 유씨에게 있어 동석은 동길보다 훨씬 가까운 친척이었으나 지능이 낮은 탓에 양자가 되지 못한 아이였다. 그런데 평소 유씨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동석의 아버지가 백 선생이 자신의 아들인 동석보다 동길을 더 귀여워하자 계략을 꾸미기 시작한다. 바로 유씨와 백 선생에 대한 모함이었다. 이에 동석의 어머니가 유씨의 하인인 삼술을 꼬드기고 마을 사람들을 매수하는 등 계획을 진행시킨다. 그런데 삼술이 이 사실을 석매에게 알린다. 석매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펄 뛰자 삼술은 잘못을 뉘우친다. 그리고 석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유씨는 서글픈 웃음만을 짓다가 호수에 몸을 던진다. 석매로부터 유씨의 유서를 전해 받은 백 선생은 그녀의 유서이자 연서이기도 한 슬픈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순정을 상징하는 비문을 써 세워준다.’

수선화는 전통적인 여인상과 도덕성을 부각하는 데 나름대로 성공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과잉현상을 보였던 이념의식이 앞선 ‘애련송’부터 한결 정제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절체절명에 몰린 노동자들 대신에 어려운 학교를 돕는 청년을 주요인물로 등장시킨 점부터가 그러했다. 폐교의 위기에 처한 청구중학교를 구한 ‘애련송’의 청년부호 필호와 방치된 사립학교를 건사하는 ‘수선화’의 백 선생이 그들이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서 계몽주의적 서사구조로의 전환을 이룬 큰 변화라고 입을 모았다.

#4. 장하오, 그대는 정말 참 장하오

김유영은 조선 카프영화의 개척자로서 그의 영화 활동 자체가 카프의 빛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후기에는 전기를 관통했던 경향파적 색채에서 벗어나 탐미적·서정적 분위기로 옮겨갔지만 민족주의를 일관되게 드러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시는 친일영화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좌익 문인들의 경우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활동했고, 카프 영화인들의 경우에는 대다수가 변절해 친일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김유영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순수 영화예술을 추구하며 예술가의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

김유영이 영화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한국영화계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심훈(沈熏·소설가이자 시인·1901~1936)은 김유영을 이렇게 소개했다. ‘좌익 영화인으로 시나리오도 쓰고 평론도 하고 감독도 하는 신인이다. 평론이나 소개는 외지의 프린팅이 많으나 이론을 실천하려고 부절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에 입각한 굳센 활동을 기대한다. 그의 나이로 보아서도 장래가 멀다.’

하지만 그 나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작 서른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김유영은 ‘조선영화계에서 일하는 어느 사람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만, 그처럼 괴로운 생활 속을 걷고 간 사람은 드물 것이다’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로 파란이 만장인 시간을 지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죽음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도 의연하게 촬영장을 지켰다. 김유영의 죽음이 알려진 후, 한 신문에 필자 미상의 추도문이 실렸다.

‘장하오. 그대는 정말 참 장하오. 조선영화계 같은 곳에서 10여 년을 바쳐온 그 정신의 고귀함이라니. 또한 그대의 노력했음도 컸노라고 나는 당당히 말하고 싶소’.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소명출판. 한국영화감독론, 김수남, 지식산업사.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론, 김종원. 카프 영화와 프로키노의 전개과정 비교연구; 이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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