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9] 네번째 영화 ‘애련송’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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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23   |  발행일 2019-10-23 제15면   |  수정 2019-10-23
아름다운 풍광 배경에 당대 최고배우 등 무려 600여명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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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 세워져 있는 김유영 감독의 작품 ‘애련송’의 스틸컷 조형물. 영화 애련송은 기존 조선 영화들과 달리 중류층 이상의 가정과 사회를 배경으로 다뤘다. 대동강, 몽금포 해안의 사구, 금강산, 경성 근처의 다양한 경치를 담았으며, 문예봉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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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송은 1937년 10월5일부터 12월14일까지 50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장기 연재됐다.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된 애련송의 첫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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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1937년 10월3일자 지면을 통해 영화소설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애련송’을 10월5일부터 연재한다고 밝혔다. 애련송은 최금동의 영화소설로,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된 작품이다.

#1. 다시, 새로운 인연

김유영이 최종 심사에 참여했던 동아일보 ‘영화소설현상공모’에서 거의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최금동(崔琴桐)의 ‘환무곡(幻舞曲)’은 ‘애련송(愛戀頌)’으로 제목을 바꿔 1937년 10월5일부터 12월14일까지 5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동아일보가 “우리가 말하는 영화소설은 소위 영화소설이라고 일컬어온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영화와 문학과의 유기적 종합이 가능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독물(讀物), 즉 읽을거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지면에 게재하면 읽는 영화가 되고 시나리오 식으로 각색하면 촬영대본이 될 것”이라고 천명했던 대로 ‘애련송’은 기존의 영화소설들과 달랐다. 기존의 영화소설들이 일반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이었던 반면, 애련송은 시나리오에 가깝게 구성돼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장면 묘사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동아일보 영화소설 공모서 100대1 당선
1937년 영화화…일정 지연 2년뒤 개봉
정략결혼 후 파경…현실도피적 주제
중류층 이상 가정과 사회 배경으로 다뤄
첫 제작 발성영화…감정 전달 성공적
각색·연출 등 작품수준 대체로 혹평


-뚜벅뚜벅.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길게 선을 끌며 지나간 굵다란 발자국. 하늘과 바다를 온통 거울인 양 맵시를 보기에 여념이 없는 갈매기의 나래가 멀리서 가까이서 희끔희끔 번뜩인다.-

당선작으로 화제를 끌었던 작품이니 만큼 애련송은 곧 영화화가 결정되었고, 동아일보사의 후원 하에 ‘극연(劇硏·극예술연구회)’이 제작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극연은 바로 김유영에게 연출을 맡겼다.

1937년 10월23일 대망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38년 3월, 극연이 시국 문제에 얽혀 일제에 의해 연극 활동이 중단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이후 극연은 이름을 ‘극단극연좌(劇團劇硏座)’로 바꾸고, 소인(素人·비전문가)극단에서 연극전문극단의 체제로 변화하는 과도기를 지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일정 지연으로 애련송은 애초의 계획보다 1년 반이나 늦은 1939년 6월에서야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6월27일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에서 개봉되었다.

#2. 대대적 홍보된 김유영의 네 번째 영화, 애련송

동아일보는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개봉을 이틀 앞둔 6월25일에는 애련송과 관련된 기사를 폭넓게 실었다. 우선은 애련송에 관련된 인물을 총망라해 안내했다.

-연출 김유영, 제작책임 서항석, 원작 최금동, 각색 이효석, 대사 유치진, 촬영 양세웅, 음악 홍난파, 미술 강성범, 자막 최일송, 조명 이상남, 동시녹음 조선영화주식회사, 의상 백상회(白商會).-

줄거리도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몽금포 해변에 놀러간 Y여자전문학교 음악과 학생 안남숙은 그곳에서 이철민이라는 음악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남숙에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온다. 남숙의 아버지 안영만은 평양 청구중학교 교장으로 경영난에 빠진 학교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이 든 터였다. 그러던 차 첫 아내와 이혼한 청년부호 강필호가 후처 자리를 알아보던 중, 교내 음악회에서 남숙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교무주임을 통해 접근한다. 평소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필호는 사랑과 사업,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라 판단하고 청구중학교에 대한 원조를 약속한 뒤 남숙에게 구혼한다. 하지만 남숙의 아버지는 귀한 딸을 후처로 보낼 수 없다며 펄쩍 뛴다. 그 무렵 철민은 음악공부를 위해 도쿄로 유학을 떠나고 남숙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필호와의 사이에서 철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청구중학교는 결국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남숙은 결국 필호와의 결혼을 통해 아버지를 돕기로 결심하고 철민에게 이별편지를 보낸다. 남숙의 희생으로 청구중학교는 기사회생한다. 그런데 남숙이 필호와 결혼식을 올리는 날 철민이 귀국을 한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철민이 결혼식장으로 달려가지만 식은 이미 끝난 뒤였다. 철민은 절망감으로 방탕에 빠지고, 결혼생활을 버티지 못한 남숙은 끝내 수도원으로 사라진다. 그제야 필호는 자신으로 인해 연인이 깨졌다는 것을 알고 남숙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남숙이 왜 필호에게 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 철민은 남숙을 되찾기 위해 수도원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그간의 마음고생으로 병을 얻은 남숙은 철민이 수도원에 당도하기 전에 죽음에 이른다.-

아울러 애련송의 특색과 장점을 별도의 광고로 실어 내보냈다.

-△극연좌 제작, 동아일보 제작후원, 이 두 가지 특징이 영화가 가진 장점의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조선 영화는 대개가 조선의 농촌·어촌·산촌의 생활을 그려왔다. 하지만 애련송은 중류층 이상의 가정과 사회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대동강, 몽금포 해안의 사구, 금강산, 경성 근처의 여러 경치, 창경원, 故 김종익(金鍾翊·민족자본가·1886~1937)씨 저택 낙산장(駱山莊)과 故 박영길(朴榮喆·일진회 간부)씨 저택 내부, 조선호텔, 부민관 천향원, 본사 강당 등 여러 곳에서 촬영함으로써 화면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조선 영화계의 최고 인기배우인 문예봉씨를 비롯해 극연좌의 일류 연기자가 총출연했다. 아울러 일류 문인, 일류 음악가, 전문학교 교수, 신문·잡지의 진보적 저널리스트가 스태프 혹은 특별출연으로 참여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가운데 풍광을 이용한 화면 구성은 연재 당시에도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첫 화를 몽금포 장면에서 시작했을뿐더러 마지막 화에는 레퀴엠이 흘러나오는 수도원과 갈매기 나는 총석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특별출연의 경우에는 서항석(徐恒錫·독문학자이자 극작가·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이 주례 역, 유치진(柳致眞·극작가이자 연출가)이 신부 역 등으로 등장해 재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연진과 엑스트라 통틀어 동원된 연기자만 무려 600여명이었다.

#3. 탐미적 세계로의 전환은 과연 성공했는가

애련송은 김유영이 제작한 첫 발성영화(유성영화의 옛말)로 그간에 드러냈던 계급투쟁의 색채를 지우고 다분히 탐미적 세계로 전환해 만든 영화였다. 이에 대해 김유영도 동아일보 지면을 빌려 담담하게 부연했다.

-애련송은 내가 처음으로 만든 발성영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에 지난 10년간 마음속에 감추고 참아왔던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부족한 기구와 불완전한 조직 탓에 당연히 흠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영화계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애련송이 조선 영화의 현재 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갔음을 자부한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평은 대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당시 극작가이자 연극연출가였던 김태진(金兌鎭)은 영화 개봉 보름 뒤인 7월11일부터 14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기고한 ‘애련송 영화평과 작품가치를 검토하면서’를 통해 “딱 조선영화작품 수준이다. 주석이지 금이 아니며, 군계지 군계일학도 아니다”고 한 뒤 조목조목 지적했다.

우선 원작부터가 나쁘다고 평했다. 영화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요소가 거의 없으니 영화 애련송은 이미 재료부터가 영화적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각색을 맡은 이효석을 향해서도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창조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인이 문학인에게 바라는 힘은 문체나 네임 밸류만이 아니라 창의와 협동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쓴소리를 했다. 아울러 문예봉을 비롯한 주연배우에게는 “스타급의 연기자치고는 연기에 창조가 없다”고 대놓고 흠을 잡았고 “학교를 하나님보다 소중히 여기는 교장이란 사람이 기울어지는 교세를 비탄하는 마당에 집이 지나치게 호화롭다”면서 연출의 미흡함도 꼬집었다.

물론 호의어린 내용도 있었다.

-애련송은 십년 전에나 보던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 시절 영화에 못지않은 결점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는 해도 여태껏 보지 못했던 품위가 있다. 수법이 산만하기는 하나 관객을 향한 감정전달도 성공적이었다. 세련된 감성 표현 등 무조건 멸시할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김유영 사후인 1940년에 발표한 ‘기유년(己酉年) 조선영화총관’에서는 조금 더 누그러진 어조로 애련송을 되짚었다.

-예전 생각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래도 덧붙이자면 인간이 잘 그려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품위를 결정하는 부녀간의 갈등도 꽤 점잖게 그려졌다. 산만한 연출과 연기 등 조선영화 공통의 미숙한 기법이 그대로 그러나있기는 하지만 교양적인 선 하나는 확실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갈증은 해갈된 셈이다.-

카프 시절에 만들었던 ‘유랑’ ‘혼가’ ‘화륜’ 세 작품을 통해 들었던 혹평 일색의 평에 비하면 한결 부드러운 반응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론,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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