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속박이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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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5   |  발행일 2019-10-15 제30면   |  수정 2019-10-15
조국 찬반과 검찰개혁 문제
우리국민 두쪽 나게 만들어
여야가 편가르고 갈등 조장
더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는
검찰 개혁보다 정치의 개혁
[화요진단] 속박이
장준영 동부지역본부장

꽤 오래전 일이다. 볕이 좋던 어느 가을 날,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다가 과일 파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해 놓은 것은 빛깔도 곱고 탐스러웠다. 이왕이면 산지에서 구입하는 게 나을 듯 싶어 별다른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농민도 돕고 싱싱한 농산물을 샀다는 즐거운 마음은 딱 거기까지였다. 집에 도착해서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상자 중간부터 밑바닥까지는 내가 봤던 크기와 품질이 아니었다. 돈보다 배신감이 훨씬 더 컸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속박이. 사전에는 ‘겉으로 보이는 바깥쪽만 멀쩡한 물건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쪽에는 그보다 작거나 부실한 물건을 두는 일 또는 그런 물건’으로 풀이하고 있다. 요즘은 이런저런 자정노력이나 현명한 소비 덕분에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한때는 선량한 농민이나 상인들이 애꿎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특히 보이는 것 그대로 믿고 구입했다가 낭패를 본 소비자들의 불신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직거래를 통해 ‘윈-윈’ 할 수 있는 근간을 위협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치도 속박이를 닮았다. 역대 모든 정권은 너나없이 ‘우리나라 좋은 나라’를 외쳤다. 수없이 속았고 ‘이번에는 다르겠지’하면서 기대감을 품어보지만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어제의 블랙리스트는 오늘의 화이트리스트가 되고, 충신과 역적은 정권의 기조와 가치관에 따라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도덕과 상식, 그리고 윤리는 언제나 서민들의 몫이었지 정치인과 권력자들에겐 필요할 때 갖다붙이는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온 나라가 14일 전격 장관직을 사퇴한 조국 전 장관과 검찰개혁으로 몇달째 난리다. ‘조국이어야 한다’는 청와대·여당과 ‘조국은 절대 안된다’는 야당의 끝모를 대립에 모든 게 실종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장관 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시스템으로 작동되어야 정상인 국가에서 개인의 거취가 발목을 잡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정부 조직도를 보면 18부·5처·17청·2원·4실·6위원회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 최근에는 청와대 및 여당과 야당, 그리고 광장만 보인다.

한국 정치는 편가르기와 갈등·혐오를 조장, 정치무관심으로 이끈 뒤 핵심세력을 규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비아냥이 있다. 그게 정말 궁극의 목적이라면 일단 성공한 듯하다.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서 정치에 관심이 없도록 만들고, 결국 소수가 민의를 대변하는 모양새로 만들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가 쉬워진다.

광장에 나온 수십 수백만은 각기 다른,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통령은 얼마 전 서초동과 광화문의 집회를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행위’로 규정했다. 그리고 조국 장관의 사퇴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검찰개혁에 방점을 찍었으며 “정치적 사안에 대해 국민의 의견이 나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국론분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의아했다. 차라리,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양상인데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심이 온당치 않나. 국정감사가 사실상 ‘조국 대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봐도 찬반 양론이 첨예한데 어떤 의미로 언급을 했는지 행간을 읽기가 어렵고 두렵다. ‘밀리면 진다’라는 여당과 ‘파면 시켜야 한다’는 야당의 싸움 속에 정작 국민들의 희망은 사그라들고 있다.

조 전 장관 가족문제로 촉발돼 일파만파로 커진 이번 사태는 한국정치를 블랙홀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검찰개혁이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청와대와 여당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를 봤을 때 검찰개혁보다 정치개혁이 더 중하고 절실한 과제라고 본다. 정치가 개혁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검찰개혁 목소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

외교나 통상 등 여러 분야에 당면한 과제가 적지 않다. 화합을 통해 국민에너지를 한 데 모아도 헤쳐나가기가 만만찮아 보인다. 빼기보다는 더하기, 나누기보다는 곱하기를 할 수 있는 발상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암세포를 죽였는데 환자마저 죽었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장준영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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