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10] 6·25전쟁 화령장전투<하>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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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4   |  발행일 2019-10-14 제12면   |  수정 2019-10-14
동관리 전투 적 356명 사살…낙동강방어선 구축 시간 벌어준 값진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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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화서면에 위치한 화령 전승기념관 야외 광장 한켠에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전차 등 군수품이 전시돼 있다. 화령전승기념관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역할을 한 ‘상주 화령장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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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 전승기념관 2층에 위치한 제1전시실에는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과 사진, 상황을 묘사한 모형들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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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 전승기념관 2층 제2전시실에는 ‘5일간의 기적’을 만들어 낸 화령장전투에 대한 전시물과 시청각 자료들이 마련돼 있다.

#1.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0년 7월18일 오전, 제17연대 제1대대가 상곡리에서 잔적 소탕에 여념이 없던 시각이었다. 국군 지휘부는 적의 후속부대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연대 정보주임에게 명령했다.

“수색대를 이끌고 갈령으로 나아가 적정을 수집하라.”

그 길로 출발해 갈령을 뒤지기 시작한 수색대 눈에 12시30분경, 자전거를 타고 갈령을 넘어서는 적병 2명이 발견되었다. 즉시로 잡아 몸을 뒤지니 북한군 제15사단장이 제48연대장에게 보내는 두 통의 문서가 나왔다.

이를 통해 아군은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15사단 제48연대가 상곡리에서 격멸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제45연대가 곧 갈령을 통과할 예정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에 제17연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먼저 제1대대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상곡리를 경계하도록 하고, 야간에 보은에서부터 이동해오느라 지친 제3대대는 연대 대비로서 화령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화령초등학교에서 대기 중이던 제2대대는 봉황산 북쪽 기슭으로 진출시켜 매복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명령에 따라 제2대대는 화령에서 봉황산 동쪽 능선을 기민하게 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지형지물에 훤한 지역 청년단원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동관리에서 하송리 사이의 3㎞ 구간을 진지로 선정했다.

아래로는 작은 하천이 977번 도로와 나란히 흐르고 도로의 동쪽은 논인 데다 그 뒤로는 산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계절을 타고 우거진 잡목 천지에 뽕나무 밭과 담배 밭까지 있어 은폐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지에서 도로까지의 거리가 20~50m에 불과하고 멀다 하더라도 100m 정도에 그쳐 기습사격에도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진지를 구축한 제2대대는 저녁 8시경에는 제7중대를 왼쪽, 제5중대를 중앙, 제6중대를 오른쪽으로 하여 와지선(산과 들이 만나는 지점)을 따라 배치한 데 이어, 도주하는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제7중대의 1개 소대를 746고지(봉황산 북쪽 3㎞)에 배치했다.

화력 배치도 완료되었다. 81㎜박격포는 갈령 방향을 사격할 수 있도록 하고, 중화기중대의 기관총소대는 중대간의 간격을 메우도록 하였으며, 대대관측소는 전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황산 5부 능선에 설치했다.

국군 17연대 2대대 동관리 일대 매복
7월21일 새벽 북한군 후미 시야 포착
신호탄 불꽃 하늘 가르자 치열한 교전
977번 도로·논바닥, 적 시체·장비 즐비
북한군 15사단 상주돌파 저지한 쾌거


#2. 동관리 전투

이튿날인 7월19일, 날이 밝자마자 제2대대는 점검에 나섰다. 경계병의 위치, 개인호의 구축상태, 공용화기의 위치, 탄약보유량, 위장상태, 화력계획 등을 파악하고 미비점이 발견될 때마다 바로바로 보완했다. 동시에 제7중대 지역의 동관리와 제6중대 지역의 송원마을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런데 오후 2시경, 갑자기 북한군 보급대열이 나타났다. 공격에 나선 아군은 적병 19명, 소 2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2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하였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던 탄약과 식량을 노획했다. 이어서 전투 상황을 보다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대대관측소를 제7중대 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던 저녁 6시경, 화령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수도사단이 작전계획 변경에 따라 제2군단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져 왔다. 지휘부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예비부대인 제3대대를 제2대대 좌측인 장자동으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분주한 가운데 하루가 또 지나 7월20일이 되었다. 진지를 구축하고 탄약도 보충하며 기다렸지만 북한군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에 대책을 고심하던 7월21일 오전 6시30분경 북한군의 후미가 제7중대의 시야에 잡혔다. 신호탄의 파란색 불꽃이 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제2대대와 북한군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북쪽 갈령 방향에서는 81㎜ 박격포를 이용해 사격했고, 중대와 중대 사이에서는 중기관총의 교차 사격을 시행하였다. 도로 건너의 개활지와 산을 향해서는 60㎜ 박격포가 포탄을 날렸고, 개인화기는 977번 도로에 집중했다. 기습 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그대로 무너졌다. 마땅한 은폐물도 없고 사격도 근거리여서 방어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침 8시가 되어 안개가 걷히자 977번 도로와 논바닥에 즐비한 북한군 시체와 군장비가 국군의 시야에 선명하게 잡혔다.

잔적까지 소탕을 완료한 오후 2시, 전과가 확인되었다. 사살 356명, 포로 26명에 박격포 16문, 반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5정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한 대승이었다. 아군도 전사 4명,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통쾌한 전투인 건 분명했다.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전방에서부터 연전연패하며 밀려 내려온 국군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상주에서 귀하디귀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3. 화령장전투의 마무리

북한군 제15사단은 예하부대인 제49연대가 동관리에서 초토화되자 전면공격을 감행했다. 눈에 불을 켠 적의 공격에 국군 제17연대장은 군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제1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7월22일 아침, 제11연대가 가장 먼저 화령에 도착했고, 오후 5시에는 제12연대가 화령 서쪽의 평온리에 집결했다. 이어서 23일 아침 8시에는 제13연대가 화령 남쪽의 봉촌리에 집결했다.

국군 제1사단의 총지휘관 백선엽 사단장은 현장을 파악한 뒤 주요진지를 봉황산에서부터 582고지(평온리 북쪽 2㎞)로 조정하고 제12연대를 주둔케 했다. 그리고 제11연대는 화령 북쪽의 상달리로 철수시켜 977번 도로를 사수토록 했다.

그러던 7월23일 아침 8시경, 1개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585고지(금곡리 동쪽 1㎞)에 나타났다. 공격이 시작되었고, 전진과 후퇴가 번갈아 반복되었다. 우왕좌왕하던 북한군은 화령 후방 8~10㎞ 지점에 방어진지를 급조했다. 하지만 채 5일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국군의 승리였다. 이때의 전투가 바로 ‘갈령 전투’와 ‘장자동 전투’였다. 이로써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국군 제1사단은 새로 투입된 미군 제25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상주로 이동하였다.

#4. 6·25전쟁에 미친 화령장전투의 의미

화령장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국군 전황은 심히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당시 북한군 제15사단은 화령에서 상주 구간을 돌파해 김천을 조기에 점령하고, 대전 지역에서 전투하던 미군 제24사단의 주력을 포위·섬멸한 뒤, 문경지역에서 후퇴 중이던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하겠다고 작전을 세운 터였다. 실제로 북한군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미군은 옴짝달싹하지 못했을 것이고, 각종 물자의 보급선이 차단되었을 것이며, 그로 인한 미군의 전방 지원도 어려워졌을 게 분명했다. 결론은 유엔군 전선의 동서 분리라는 참담한 결과였다.

그런데 국군 제17연대가 화령장전투에서 승리를 이끌고, 국군 제1사단이 마무리를 확실하게 지음으로써 북한군 제15사단의 작전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에 상주~김천~대구를 잇는 축선을 지켜내면서 소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뚫고 상주를 점령한 후 일거에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좌절시킨 의미 있는 전투다. 특히 미8군 사령관이 계획하고 있던 낙동강방어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값진 승리였다.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화령이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의미 있는 땅으로 제 몫을 해낸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한국전쟁과 화령장 전투, 상주문화원.

건물 외관 전차 궤도 모양 본떠…호국의 고장 상주 소개 다양한 기록 전시
■ 2018년 10월 개관한 화령 전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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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 전승기념관 전경. 전차 궤도 모양을 본떠 지어진 건물 외관이 눈길을 끈다.


화령 전승기념관은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상주 화령장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2015년 첫 삽을 뜬 이후 2018년 10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전승기념관 외관은 전차의 궤도 모양을 본떠 지어졌다. 1층에는 관람객 편의시설과 북카페, 2층에는 제1전시관(호국 역사관)과 제2전시관(화령 전투관)이 위치한다.

제1전시관에는 정치·경제·교통·군사적 요충지였던 ‘호국의 고장’ 상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충의공 정기룡 장군에 대한 기록이 정리돼 있다. 제2전시관에서는 상곡리 전투와 동관리 전투에 대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야외 잔디광장에는 참호와 교통호, M1 소총 가늠자 조형물 등 다양한 상징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또 광장을 가로지르는 승리의 길에는 당시 전투 일지를 바탕으로 화령장 전투의 작전 전개과정이, 기억의 정원에는 신원이 밝혀진 화령장전투 참전용사 184명의 이름이 새겨있다.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과 명절기간은 휴관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상주시 공식 블로그(https://blog.naver.com/greatsangju)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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