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21] 고전의 향기가 그리운 시간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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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0   |  발행일 2019-10-10 제20면   |  수정 2019-10-10
입에서 뱉은 펀치로 망가진 말
20191010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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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있는 말이 그립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적나라한 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서로 부딪치는 상황이라 그럴 것이다. 말과 뜻이 분리된 채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반복되는 말들이 말의 기능과 가치를 손상시키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니 주의 깊게 써야 한다는 옛말을 꺼낼 수조차 없을 만큼, 말들이 망가진 세상에 살고 있다. 말의 세련된 맛이나 말을 그렇게 함으로써 드러나는 사람의 품격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갈증을 달래는 한 방편으로 소설을 읽는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편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1912)이다.

이 소설은 문제적이다. 20세기 초에 발표되었으면서, 단 두 명인 중심인물이 동성애 관계에 놓여 있는 까닭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이 50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미를 구현한 작품을 발표하여 전 국가적 명성을 획득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작가 구스타프 아셴바하이다. 그는 휴양차 여행 온 베니스에서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14세 소년 타치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소년의 모습이 신의 구현이라고 생각하며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던 주인공은, 차차 태도를 바꾸어 미혹된 행태를 보이게 된다. 자신의 예술관을 바꾸어가면서 소년을 주시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품위도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채로 소년을 쫓아다니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스토리만을 보면 중년의 남성이 소년을 쫓아다니며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를 보인다고 하겠다.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이러한 스토리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동성애가 잘못도 아닌데다, 남성동성애를 다룬 문학작품이 두루 주목받기도 하는 상황인 까닭이다. 2018년 미국의 퓰리처 상 픽션 부문은 앤드루 손 그리어의 ‘레스’에 주어졌고 문학동네가 행하는 젊은작가상의 10주년 대상은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 돌아갔는데, 두 작품 모두 남성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이들 소설이 남성동성애자를 다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작품성으로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 두 작품은, 주인공을 게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려 준다.


프레임 만들기 위해 거짓과 거친 말 남발…말의 기능·가치 손상
민감한 주제 거리 두고 말하거나 깊은 사색으로 흥분 가라 앉혀야



하지만 1912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발표될 무렵의 사회상황은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리면 된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것이 1912년 4월이니 이 소설이 출간된 그해이다.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1912년 시점에서 상류층 사람들은 귀족 의식이 매우 강한 면모를 띤다. 영화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딸의 혼사를 통해 몰락한 가문을 되살리는 것이다. 해서 그녀는 평민인 남성 주인공과 딸의 관계에 훼방을 놓는다. 20세기 초가 되었지만 봉건시대의 신분제에 대한 향수가 짙은 것인데, 사실이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따지고 양반 조상을 자랑하는 일이 1970년대까지도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상류 계층의 품위와 예절, 고상함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동성애적인 설정을 보이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문제적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20여 년 전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9)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로 고발되어 옥살이를 했으며, 1928년에 처음 나온 D. H. 로렌스의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은 나오자마자 금서가 되어 1960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1934)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1955) 또한 출간 즉시 금서가 되었다가 후에 복권되었다. 성애를 다룬 작품들의 사정이 이러하니, ‘베니스에서의 죽음’ 또한 그러한 문제를 겪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작품의 주된 주제효과가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중심으로 하는 예술론으로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인공 구스타프 아셴바하는 부모로부터 상이한 경향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부계로부터는 엄격하고 단정하며 검약한 삶을 살며 성실한 정신력으로 소임을 다하는 태도를 이어받았다. 이러한 자세로 그는 도덕성을 내세우며 작가의 길을 걸어와 명성을 얻었다. 한편 모계로부터는 성마르고 육욕적인 핏줄을 이어받아 어둡고 열정적인 충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이 도덕성에 의해 억눌려 있다가 베니스에서 분출된 것인데, 이 과정이 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로 개진된다.

미소년 타치오에게 매혹되면서 주인공은, 아름다움만이 인간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형태라는 점을 깨닫는다. 아름다움이란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며 그 길을 밟아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굴욕 또한 찬사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 위에서 그는 예술가 기질의 본질을 규율과 무절제의 오묘한 본능적 결합에서 찾으며(민음사 판, 485쪽), 예술가란 지혜로울 수도 품위가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오로지 에로스의 안내를 통해서 감각적인 것을 통과해야만 정신적인 데 이를 수 있기에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방종해지고 감정의 모험에 빠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525쪽). 주인공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심도 있는 사색이 지속되어,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탐구라는 면에서 제 몫을 확고히 가지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보이는 동성애적인 코드가 문제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주인공에 대한 서술자의 태도에서 찾아진다.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을 취하는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처음에 주인공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1절). 그의 성실함과 도덕성, 위대한 성과를 서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를 상찬하는 면모를 띠는 것이다. 하지만 뒤로 오면서 서술자와 주인공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다. 관찰하는 시점을 취하면서 ‘이 작가는’ ‘그는’ 식으로 기술한다(2~3절). 4절에 이르면 3인칭 시점만큼 거리를 벌리면서 ‘그 늙어가는 예술가’ ‘그 열광한 자’ ‘그 외로운 사람’ ‘매혹당한 남자’와 같은 표현을 쓴다. 그럼으로써 서술자 자신과의 동일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마지막 5절은 더욱 냉정하다. 주인공의 행위가 ‘악령의 지시’를 따른다고 평가하거나 그의 바람이 ‘가당치도 않은 희망’이라고 규정하는 식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렇게 서술자와 주인공의 거리를 점차 확대함으로써 주인공의 행태에 대해 있을 수도 있는 윤리적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주제효과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천착, 낭만적 열정에 대한 상이한 태도로 변별되는 예술의 갈래와 각 지향이 갖는 의미의 포착, 예술가의 존재 유형에 대한 통찰 등이 이 작품의 의미망을 이룬다. 이렇게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예술론적인 주제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세계 소설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귀족주의적인 편견과 완고함이 팽배했던 1912년의 시점에 동성애 코드를 구사하면서도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별다른 문제 없이 출판되어 두루 읽히게 된 데는 이상의 두 가지 특징이 작용하고 있다. 스토리 자체는 문제될 만한 것으로 설정해도, 그와 관련된 깊이 있는 상념이 문제의 소지를 상쇄시키고 그 스토리를 말하는 자세가 문제를 예방하도록 호흡을 길게 만든 것이 필화를 없앤 셈이다.

거짓된 말이 사태를 호도하고 거친 말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오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보이는 이러한 특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이 성취해낸 태도 곧 거리를 두고 말하는 방식과 섣부른 해석을 경계하는 깊은 사색이야말로, 문제적인 것을 두고 성마르게 흥분하는 우리의 세태를 돌아보게 해 준다. 이런 점을 들어 고전의 의미를 말하면 망발이겠지만, 이런 지적조차 아쉬운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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