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13]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 청송백자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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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8   |  발행일 2019-10-08 제14면   |  수정 2019-10-08
절제된 디자인·단아한 선·맑은 한지색…‘자연이 빚은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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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왕산면 신점리 법수골에 위치한 청송백자전수관 내 전시된 백자가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청송백자는 법수도석으로 만들어져 그릇의 두께가 얇고 가벼우며 맑은 한지 색을 띤다. 작은 사진은 소멸위기에 처했던 청송백자의 명맥을 다시금 이은 고(故) 고만경옹의 생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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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백자전수관에는 도석 광산의 채굴 흔적과 기계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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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백자 전통 가마인 사기굴의 모습. 처음에 넣은 땔감이 모두 타면 더 넣지 않고 가마 중간에 나 있는 구멍에 창불로 화력을 조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청송백자는 생활자기다. 밥그릇, 국그릇, 종지나 접시부터 변기, 양푼, 요강, 제기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청송백자는 일상과 늘 함께한 자기였다. 그 모습은 매우 담담하다. 절제된 디자인과 단아한 선,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단정함과 차분한 기품을 가졌다. 청송백자의 흰색은 아이보리에 가까운 연한 크림색을 띤다. ‘맑은 한지 색’ 청송백자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따뜻하고, 깊고, 우아하다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그 빛깔이 비로소 정확한 표현과 만난 듯하다. 거기에 옅은 파랑색 선이 더해져 한지의 맑은 색은 더욱 깊어진다.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청송백자는 현대에 다시 부활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청송백자는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다.

#1. 자연이 빚은 그릇, 청송백자

청송백자는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후기 대표적인 생활도자기다. 해주백자, 회령자기, 양구백자와 함께 조선시대 4대 지방요(地方窯) 중 하나이며 경상도 지역에서는 문경사기와 양대 산맥을 이루며 활발하게 생산되어 왔다.

19세기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와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산업지’에서는 청송백자를 청송지역의 특산물로 기록하고 있다. 2005년 청송지역의 가마터 지표조사에 따르면 16세기부터 백자가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15세기에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송군이 백토의 산지임을 기록하고 있어 16세기 이전에 이미 백자가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500여년 역사 지닌 대표적 생활도자기
희귀광물 함유한 ‘법수도석’으로 제작
서유구 ‘임원경제지’ 청송특산물 기록
19세기말∼20세기 중반 생산 가장 활발
1958년 명맥 끊겼다 고만경옹이 재현
맥 이은 젊은 전수자들 전승·보존 힘써



청송백자의 재료는 ‘도석(陶石)’이다. 도석은 도자기의 주원료가 되는 점토질, 규산질, 장석질 등의 광물들을 함유하고 있는 물질로, 도석 그 자체만으로도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암석을 말한다. 도석은 여러 곳에서 많이 나지만 청송에서 나는 도석은 특별하다.

청송 도석은 과거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활동 이후 생겨났다. 거기에는 ‘리튬 베이어링 토수다이트(Li-bearing tosudite)’라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는 국내의 청송 법수와 해남 성산 두 곳을 포함하여 세계 열 곳 미만의 지역에서 채취되는 희귀 광물이다. 그래서 ‘청송백자는 자연이 빚은 그릇’이라고들 한다.

청송 도석은 주왕산면 신점리 법수골 일대에서 채취되어 법수도석이라 불리며 오랜 옛날부터 청송백자의 주재료로 이용되어 왔다. 법수도석이 ‘맑은 한지 색’을 낸다. 또한 법수도석으로 만들어진 청송백자는 그릇의 두께가 얇고 가벼우며 수분 흡수율도 높아서 사발에 밥을 담아 놓으면 밥알이 들러붙지 않고 잘 쉬지도 않는다.

청송지역에서 확인된 가마터는 총 48기다. 가마터는 청송도석의 출토지인 법수광산을 중심으로 반경 10㎞ 이내에 위치한다. 운영 시기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로 폭넓은 편인데 주로 17세기와 20세기에 운영된 가마터가 많다. 청송백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어 유통되었고 1920~1930년대에는 일본 각지로도 활발하게 판매되어 명성을 크게 얻었다. 이후 공업용 제품이 출현하면서 1958년경 청송백자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소멸위기에 처해있던 청송백자의 제작기술은 십수년간 사기대장으로 일했던 고(故) 고만경옹에 의해 2007년에 재현, 전승될 수 있었고 청송백자는 2009년 청송군 향토문화유산(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2. 청송백자 전수장 故 고만경옹

고만경옹은 청송 부남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열다섯 되던 해 부남면 화장리 웃화장공방에 들어가 백자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백자 만들기를 배운 지 3년 후 대장 노릇도 했지만 공방이 문을 닫으면서 다른 여러 공방들을 전전했다. 1947년 한소밭골 공방을 시작으로 설티, 웃화장, 질티, 법수 등에서 사기대장으로 일했던 그는 맏형과 함께 직접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발, 대접, 접시 등 막사발을 만들며 15년간 백자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하지만 공업용 제품의 출현으로 경쟁력을 잃게 되자 1958년 공방의 문을 닫고는 대구, 포항 등지를 돌며 행상, 농막일 등을 하며 생활을 하게 된다.

2003년, 일흔 여섯의 고만경옹은 청송백자의 복원 작업을 재개했다. 이에 청송군의 복원 의지가 맞물려 2009년 청송백자는 청송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고만경옹은 청송백자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청송백자전수관이 개관되었다. 그는 젊은 전수자들에게 청송백자의 전통에 대한 가르침을 주며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다 2018년 5월, 89세 일기로 타계했다.

#3. 청송백자의 제작과정

가장 먼저 도석을 채취해 힘 좋은 디딜방아로 빻는다. 분쇄된 돌흙은 물에 넣어 미세한 흙분을 받는다. 그렇게 걸러진 것이 밀가루와 비슷한 순백색의 ‘질(도토)’이다. 도토는 성형할 때까지 완전히 건조시켜 보관한다. 그래야 성분의 변질을 막아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다.

건조된 질은 ‘질 밟기’를 통해 성형작업에 용이하도록 질의 점도를 높이고 내부의 공기를 뺀다. 이후 가소성과 점성을 높이는 ‘꼬박밀기’가 이루어진다. 적당한 수분이 유지되도록 질에 물을 묻혀가며 두드리고 비비고 굴려 길이 50㎝, 직경 20㎝ 내외의 끝이 뾰족한 원통형으로 만들어준다.

질이 준비되면 전통 재래식 발 물레를 이용해 그릇의 모양을 만드는 ‘사발짓기’를 한다. 완성된 그릇은 적당하게 건조한 뒤 그릇의 굽을 만드는 ‘굽깎기’를 한다. 그리고 그릇에 그림을 넣는다. 청송백자는 일상 식기류의 일부에만 그림을 넣었으며 대부분 추상적인 그림이 많다. 이후 그릇의 표면에 광택을 주기 위해 유약을 바른다. 청송백자는 청송지역에서 많이 산출되는 ‘회돌’과 ‘보래’라는 광물을 빻아 각각 물에 풀어 2대 8의 비율로 혼합한 유약을 사용한다. 유약 처리 후에는 그릇의 건조에 심혈을 기울인다. 번조(굽기) 전에 수분을 최대한 제거해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가마에 불을 때기 전에 도석 원료를 물에 개어서 사기굴 내부에 칠해 준다. 내화력이 강한 도석 원료가 가마 내부에서 발생하는 재와 같은 이물질이 사기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기를 가마의 내부에 차곡차곡 쌓고 가마를 폐쇄한 뒤 불을 땐다. 청송에서는 ‘달음칸’이라 하는 가마 아궁이에 땔감을 가득 채우고 불을 지핀다. 처음에 넣은 땔감이 모두 타면 더 넣지 않고 가마 중간에 나 있는 구멍에 창불로 화력을 조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번조가 끝난 사기는 가마에서 꺼내 하루 정도 뒤 손으로 만져 따뜻한 정도의 온도가 되면 ‘사발따기’한다. 청송에서는 이 작업을 ‘굽따기’라고 한다. 그리고 불량품을 가려내고 마당으로 옮긴다.

#4. 청송백자전수관

청송백자전수관은 청송군 주왕산면 신점리 법수골의 야트막한 산 아래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예스럽고 적요한 분위기다. 도석 광산의 채굴 흔적과 기계들이 옛 모습 그대로 있으며 광산 사무실, 전통공방(사기움), 전통가마(사기굴), 주막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움집형 원형 구조의 ‘사기움’은 벽체를 잡석과 진흙으로 쌓아 보온과 습도를 조절하는 공간이다. 청송백자를 빚고, 말리고, 보관하는 일련의 제작 행위가 모두 이곳에서 이뤄졌다. 사기굴에서 사기가 나오는 날은 ‘점날’이라 했다. 점날에 맞춰 보부상들이 집결했고 주막에 봇짐을 풀고 술도 거나하게 마셨다. 완성된 청송백자가 마당에 부려지면 보부상들은 각자 제 몫을 지고 먼 마을들로 떠났다.

현재 청송백자전수관에는 고만경옹으로부터 청송백자의 전통기술을 전수한 수석전수자 윤한성을 비롯한 안세진 등의 젊은 전수자들이 전승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전수자들은 2012년부터 고만경옹으로부터 배운 전통적인 청송백자를 현대적인 실용도자기로 재해석해 브랜딩하기도 했다. 생산된 청송백자는 백화점과 면세점 등에 납품되고 있으며 지역민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청송백자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청송백자 전수자들은 매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세계적인 흐름을 살피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올 것인지를 계속 탐색하며 전통을 발판으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송백자전수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청송문화재대관.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공동기획지원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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