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6] 구인회 활동과 탈퇴, 그리고 카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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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5   |  발행일 2019-09-25 제13면   |  수정 2019-09-25
순수창작모임 구인회와 이데올로기 갈등…결국 다시 카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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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구인회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쓴소리도 들려왔다. 비평가인 김두용은 1935년 7월28일부터 8월1일까지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문단동향의 타진-구인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글을 싣고 순수문학모임의 성격을 가진 구인회가 민중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비판했다. 김유영 역시 구인회가 카프에 대한 견제 역할 보다 단순히 친목모임에 그치자 결국 탈퇴를 결정한다.

#1.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다

1933년 9월15일, 김유영을 중심으로 이종명(李鍾鳴·소설가), 정지용(鄭芝溶·시인·1902~1950), 이태준(李泰俊·서정적 단편소설 대표작가·1904~?), 이무영(李無影·농민문학 대표작가·1908~1960), 김기림(金起林·모더니즘 대표작가·1908~?), 조용만(趙容萬·소설가·1909~1995) 등 구인회(九人會)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첫 월평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효석(李孝石·소설가·1907~1942)과 유치진(柳致眞·극작가이자 연출가·1905~1974)의 불참이 아쉬웠지만 회원들의 표정에는 설렘과 진지함이 함께 맴돌았다.

“오늘 합평할 작품은 이종명의 소설 ‘순이와, 나와’, 이태준의 소설 ‘아담의 후예’, 김기림과 정지용의 시, 그리고 이무영의 희곡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돌아가면서 작품에 대한 평이 이어졌고 드디어 김유영의 차례가 되었다. 김유영은 정지용의 시를 제외한 모든 작품에 성의 있는 비평을 내어놓았다. 정지용을 제외한 이유는 정지용이 김유영과 다른 세상의 사람인 까닭이었다. 구체적으로 정지용은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와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적인 시를 짓는 이였다. 김유영과의 사이에 교집합이 전혀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어쨌든 이 과정에서 김유영은 이무영의 희곡 ‘아버지와 아들’에 주목했다.

“등장인물들이 핍진하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거짓됨이 없이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 표현이 잘 되었다는 뜻이었다. 김유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약 한 달 뒤인 10월7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한 개의 자유주의 작품’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더 자세한 의견을 내어놓았다.

“이무영은 동반작가로 불린 적이 있으며, 또한 그렇게 불릴 만한 작가다.”

동반작가(同伴作家)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그 뜻에는 동조하는 경향의 작가를 일렀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치면, 카프의 정식 회원은 아니나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이해가 높고, 작품 활동도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작가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 동반작가로서의 사상성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내용은 몰락에 처한 조선 농촌의 중산 계급 집단에서 일어난 시대적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사상보다는 부성애를 묘사하는 데 더 치중했고, 그나마 사상이 드러난 부분마저도 리얼리티 없이 암시만 하는 데서 그쳤다.”

결론적으로 아쉬움이 크다는 소리였다. 김유영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지적이었다. 구인회를 결성할 때 김유영이 목표로 삼은 것은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각색자·감독이 밀접하게 연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한다”였다. 김유영으로서는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반영한 리얼리즘’적인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무영의 희곡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김유영은 적이 낙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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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제작연구소 창립 소식을 다룬 1934년 5월2일자 동아일보. 구인회에서 탈퇴한 김유영은 조선영화제작연구소 창립에 참여했다. 조선영화제작연구소는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각본·미술 등 각계 전문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직이었다. 이는 김유영의 ‘카프 복귀’를 뜻했다.

친목모임 구인회, 카프 견제 역할 한계
사상적 동지 이종명과 함께 조직 탈퇴
1934년에 ‘조선영화제작연구소’ 참여
감독부·각본부서 비중있는 활동 펼쳐


#2. 운명적인 딜레마

구인회가 ‘순수’ 문학단체의 모습을 한 건 맞았다. 그런 구인회를 발족할 때 김유영이 선두에 섰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유영의 의식과 작품 경향은 현실에 밀접히 닿아 있었다. 그런 면에서 김유영은 카프를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세계관 쪽에 발을 딛고 서있는 셈이었다. 다만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 과정에서 카프가 보인 일방적인 면에 저항하다 보니 구인회 결성까지 밀려오게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김유영에게는 구인회에 바라는 기본적인 기대치라는 게 있었다. 바로 카프에 대한 견제 역할이었다. 하지만 구인회는 점점 갈수록 친목을 도모하는 순수창작모임의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유영으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김유영은 결단을 내렸다.

“내가 공들여 구성하기는 했어도 더는 함께 할 수 없겠다.”

결국 김유영은 사상적 동지인 이종명과 함께 구인회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조용만은 1993년 ‘상허학보’에서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유영과 이종명은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회원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결국 두 사람은 모임의 발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 참석한 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가자 그때까지 마음을 붙이지 못하던 이효석이 그 뒤를 이어 구인회를 빠져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면서 비워진 자리는 박태원(朴泰遠·필명 구보·모더니즘 대표작가·1910~1986), 이상(李箱·시인이자 소설가·1910~1937), 박팔양(朴八陽·시인이자 평론가·1905~1988)이 채웠다.

그리고 유치진과 조용만이 나간 자리는 김유정(金裕貞·소설가·1908~1937)과 김환태(金煥泰·평론가·1909~1944)가 메웠다. 이처럼 구인회는 14명이 들고나는 가운데 언제나 9명을 유지했다.

구인회는 이후 3~4년에 걸쳐 월 2~3회의 모임을 비롯해 3~4회의 문학강연회를 가졌고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1회 발행했다. 그러는 동안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던 각자의 역량을 바탕으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쓴소리도 있었다. 1935년 7월28일부터 8월1일까지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실린 ‘문단동향의 타진-구인회에 대한 비판’에서 김두용(金斗鎔·비평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1903~?)은 구인회에 속한 작가들이 “자아의 완성 속에 틀어박힌 것으로 보이니 조선민중이 생활을 찾으려 헤매는 이때에 붓을 칼날로 삼아 용진해야만 작가적 명예를 보증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구인회여!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는 동시에 조선의 민중을 사랑하는 열정도 가지라”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럼에도 후대는 구인회를 일러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함과 동시에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의 성격으로 전환시키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바로 그 가치를 빚은 사람이 김유영이었다. 비록 구인회를 바로 떠나기는 했어도, 그가 아니었다면 구인회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다시 카프로

김유영이 구인회를 결성했던 1933년 8월로부터 약 8개월 뒤인 1934년 5월2일, 동아일보에 기사 하나가 실렸다.

-조선 영화의 진실한 발전을 도모하고 진정한 예술적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아래의 인물들이 ‘조선영화제작연구소’를 조직해 시내 권농동 95번지의 임시사무소에서 활동 중이다.-

아래의 인물들, 즉 연구소에 속한 인물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서무재정부에 김태식·전유협, 제작연구부에 박완식·전평, 각본부에 나준영·김철, 감독부에 김유영·박철민, 연기부에 나웅·금광·박순돈·이귀례·최옥희, 미술부에 박진명, 촬영부에 김태영·전평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태반이 카프 소속의 인물이었다. 전평, 나웅, 박완식이 카프 영화부 소속이었고, 박진명은 카프 미술부 임시사무국 담당이었으며, 이귀례 또한 카프의 회원이었다. 이는 곧 ‘조선영화제작연구소’가 카프계의 단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감독부에 김유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유영이 카프로 돌아갔다는 의미였다.

또 하나, 이들 15인은 다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전평은 전유협, 나웅은 나준영, 박철민은 박완식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각본부에 이름을 올린 김철(金哲) 또한 김유영의 또 다른 가명이었다. 따라서 카프의 주요 인물들이 이름 두 개를 이용해 모든 부서에 포진한 셈이었다. 김유영도 감독부와 각본부 두 부서에 이름을 올렸으니 만큼 조선영화제작연구소에서 차지한 그의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는 뜻이었다.

김유영의 카프 복귀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시나리오를 위해 문인들과 연대했으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일치를 보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김유영이었다. 카프와 불화하기는 했어도 카프의 뜻을 한결같이 지지했던 그로서는 카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아간 김유영을 카프도 환영했다. 실제로 조선영화제작연구소는 그간에 김유영이 밝혀왔던 구상이 상당 부분 반영된 단체였다. 조선영화제작연구소 자체가 김유영이 1931년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영화공장’과 1933년에 조선일보에 발표한 ‘영화예술연구소단체’와 맥락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영화제작연구소는 김유영이 늘 주장했던 대로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각본·미술 등 각계의 전문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조직되었다. 무엇보다 김유영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몰두했던 시나리오 전문 부서가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제야 자리가 잡히는가, 하는 생각이 김유영에게 들기 시작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한국현대문학사, 조연현. 김유영론, 현순영. 구인회 형성기 연구, 안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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