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11] ‘옹기인생 60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5-가호 이무남 옹기장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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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4   |  발행일 2019-09-24 제14면   |  수정 2020-03-18
흙과 불에 혼…천년을 살아 숨쉬는 ‘새 생명’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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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무형문화재인 이무남 옹기장이 가마에 굽기 전 청송옹기를 두손으로 만져보며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청송옹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송에서만 나는 오색 점토로 만들어진다. 오색 점토를 사용한 옹기는 잿물을 잘 흡수하고 고온에 잘 견디는 성질을 지닌다.

살아 숨 쉬는 우리의 그릇, 옹기. 수수하며 모나지 않은 자태가 멋스러운 한국인의 그릇이다. 청송군 진보면 진안리에 ‘옹기도막길’이라 명명된 길이 있다. 예부터 질 좋은 흙이 풍부해 옹기굴이 많았던 동네다. 살림살이가 편리해지면서 옹기의 수요는 줄어들었고 옹기장이들은 하나 둘 가마를 헐고 떠났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에서는 오직 청송에서만 나는 오색 점토로 빚은 청송옹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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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남 옹기장이 칸막이가 없는 대포가마를 정리하고 있다. 이곳의 대포가마는 1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청송옹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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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서 일주일 이상, 최고 1천200℃가 넘는 열기를 견디고 완성된 청송옹기들. 수수하고 모나지 않은 자태가 멋스럽다.
18살때 고향 상주서 옹기 기술 배워
1959년 오색 점토 있는 청송 진보로
어렵게 시작한 첫 공장 아쉽게 정리
1967년에 다시 시작 청송옹기 외길
가업 이은 아들도 20여년 실력 쌓아


#1. 옹기장 이무남

청송 옹기장 이무남의 고향은 상주 부원동이다. 예부터 그의 고향은 옹기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옹기공장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도 옹기 일을 했다고 한다. 어린 이무남은 공장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비울 때면 물레 앞에 앉아 어깨 너머로 본 것을 흉내냈다. 그렇게 처음 옹기를 배웠다. 18세 되던 해 이무남은 옹기장이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고향의 옹기 공장에서 6개월간 본격적으로 옹기 기술을 배웠다. 다른 이들이 3년에 걸쳐 배우는 것을 그는 6개월 만에 터득했다.

1959년 19세의 이무남은 청송 진보로 향했다. 청송으로 향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흙이었고, 그것은 옹기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상주에는 흙이 두 가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옹기장수들은 청송의 흙이 제일이라 했다. 오죽했으면 다른 지역에서 나온 옹기도 청송옹기라고 속여서 팔 정도였다.

청송 진보로 온 이무남은 땅을 파 보았다. 30㎝ 간격으로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누르스름한 색, 검은색의 흙이 켜켜이 있었다. 이런 흙은 청송밖에 없었다. 그는 진보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되지 않아 영양 입암면에 있는 한 옹기공장이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영양으로 달려갔다. 그에게는 1천500원이 전부였다. 한 식당을 찾아가 가진 돈을 모두 내어놓고 음식을 잘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동네 유지들을 모두 초대했다. 그는 동네 유지들에게 넙죽 큰 절을 올리고는 옹기공장을 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결국 그는 옹기공장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을 땔 장작도 없었다. 그는 옹기장사꾼들에게 나무를 대 주면 옹기를 빚어 갚겠다고 했다. 처음 옹기가 세상의 빛을 보는 날, 사람들은 옳은 기술자가 왔다고들 했다.

옹기는 잘 구워졌다. 굽는 대로 돈이 생겼고, 그는 빚진 돈을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그는 약속을 잘 지키고 신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영양 입암에서의 옹기공장은 잘 돌아갔다.

3년째 되던 해, 입대 3일 전에 영장이 날아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에게 공장을 맡기고 입대했다. 군대에서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휴가를 받아 공장을 돌봤다. 그러나 옹기공장은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제대 후 돌아왔을 때는 도로 확장으로 옹기점 3분의 1이 도로에 포함되어 버렸다. 그는 공장을 정리했다. 이후 잠시 포항 오천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1967년 27세에 다시 청송 진보로 돌아왔다. 흙 좋은 청송에 자신의 옹기공장을 갖는 것이 그의 오래된 꿈이었다.

#2. 오색 황토가 옹기가 될 때까지

청송옹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송에서만 나는 오색 점토로 만든 옹기를 말한다. 두 가지 흙을 사용하는 옹기에 비해 오색 점토를 사용한 옹기는 잿물을 잘 흡수하고 고온 속에 넣어도 잘 견디는 성질이 있다. 당시 흙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색 점토를 채취해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보리, 쌀, 콩, 밀 등과 같은 현물과 교환되었다.

이무남이 19세에 처음 진보로 왔을 때 진안리 일대에는 옹기 공장이 13곳이나 있을 만큼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옹기도막은 줄어들었고 흙을 파는 이들도 점차 도시로, 공장으로 떠났다. 이무남은 1972년도부터 오색 점토가 나는 땅을 사서 직접 흙을 캐내어 옹기를 굽고 있다. 그에게 청송의 흙은 보물이다.

흙은 굴을 파고 들어가 캐내야 한다. 비가 많이 와도 안 되고, 땅이 너무 꽝꽝 언 상태여도 안 된다. 보통 음력설을 지내고 땅이 채 녹기 전에 굴을 파고 흙을 캔다. 그렇게 1년 동안 쓸 흙을 마련한다.

작업할 흙은 물을 주면서 비비고 뒤집어 흙이 물을 잘 먹을 수 있게 한 뒤 다지고 밟아 차지게 만든다. 그리고 흙을 얇게 깎으면서 불순물을 걸러낸다. 이렇게 반죽이 완성되면 물레 위에 올리고 동그랗게 바닥을 만든다. 그 위로 떡가래처럼 길게 뽑은 흙을 한단씩 쌓아 올려가며 안과 밖을 두드려 옹기의 모양을 잡는다. 옹기 원형이 완성되면 나무를 태워 나온 재와 약토(밭이나 산에 오래도록 쌓인 먼지처럼 보드라운 흙)를 섞어 만든 잿물을 옹기에 입힌다. 그리고 20일 정도 그늘에서 말린 뒤 가마에 넣는다.

가마를 다 채우면 불을 땐다. 보통 일주일 밤낮 불을 지핀다. 날씨에 따라 길게는 15일 정도 때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연기만 날 정도로 때다가 차츰차츰 불을 키운다. 불이 커지고 막바지에 이를 때에는 ‘한불’이라 부르는 최고 높은 온도의 큰 불을 땐다. 그때 가마 안의 온도는 1천200℃가 넘는다.

한불 속에서 옹기는 고무처럼 물렁물렁해진다. 열기를 이겨내야만 깨지지 않고 단단한 옹기가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옹기는 숨을 쉬고 독을 빨아들여 정제하는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흙과 불과 잿물의 삼위일체, 거기에 옹기장이의 열의가 더해지는 것, 그렇게 청송 옹기가 탄생한다.

#3. 代를 이어 빚는 청송옹기

이무남은 그렇게 청송옹기를 만들어왔다. 그는 올해 81세. 19세에 옹기를 시작했으니 옹기를 배우고 업으로 삼아온 세월이 60년 넘었다. 옹기가마도 그의 손으로 유지되고 있다. 칸막이가 없는 이른바 ‘대포가마’는 100년이 넘은 것이다. 그가 이곳 옹기공장을 인수할 때부터 있었다. 가마는 불기운 때문에 2~3년에 한 번 정도는 보수를 해야 한다. 100년 넘은 가마는 그의 정성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무남의 작업장 곁에는 청송 옹기 체험장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가깝게 청송옹기를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이무남의 아들들이 그의 뒤를 이어 옹기를 굽고 있다. 막내아들이 옹기를 배운 지는 20여년,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라 한다.

옹기도막길의 좁은 오르막을 따라 양 옆으로 커다란 옹기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옹기들은 옹기 체험장과 청송 옹기장 이무남의 자택 주변, 작업장 담벼락까지 구석구석에 진열되어 있다. 예전에는 어느 집에나 장독대가 있었다. 양지바른 뒤안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햇볕 쬐던 장독들. 매일 닦아주며 들숨, 날숨, 잘숨 쉬라고 정성으로 애지중지 했다. 옹기는 1960년대 말부터 그 사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 나라에서는 옹기 보호책의 일환으로 1989년 옹기 인간문화재 지정, 1990년 옹기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하여 정부 차원에서 옹기를 보호 및 지원하고 있다. 청송 옹기장 이무남은 1997년 3월17일 경북도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송문화재대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송재선, 우리나라 옹기, 동문선, 2004. 문화재청.
공동기획지원: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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