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5] 구인회, 새로운 단체의 결성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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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8   |  발행일 2019-09-18 제13면   |  수정 2019-09-18
작가·각색자·감독 등 9명 의기투합 反카프 단체 만들어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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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는 김유영 감독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구미 출신인 김유영은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을 주도하며 혼가, 화륜, 애련송, 수선화 등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남겼다. 기념비 뒤쪽으로 김유영이 제작한 영화의 스틸컷 조형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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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결성 소식을 전한 1933년 9월1일자 동아일보.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김유영은 보폭을 넓혀 ‘문학에 대한 순수 연구’를 목적으로 구인회 결성에 나선다. 구인회는 1933년 8월 김유영을 비롯해 이종명,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정지용 등 9명이 결성한 단체다.

#1. 한계에서 벗어나 지경을 넓혀라

김유영이 절감한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한계는 크게 세 가지였다. 카프와 비(非)카프의 불화,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본, 창작과 표현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일제의 검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김유영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지었다.

첫째, 새로운 단체의 결성이었다.

“프로문학은 카프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굴러가고 있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체계를 지닌 권위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

프로문학, 즉 프롤레타리아문학은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을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반영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궁극의 목표로 삼은 문학을 일렀다. 바로 카프가 추구하는 바였다.


영화계 불화·부족한 자본·검열에 한계
새 단체 조직·리얼리즘 영화로 돌파구
이종명·이태준·이효석·김기림 등 합심
1933년 8월 ‘구인회’구성해 본격 연대



둘째, 리얼리즘 영화의 제작이었다.

“노동자의 생활이나 투쟁을 직설적으로 그린 영화는 상영 전에 이미 검열에서부터 걸린다. 따라서 우리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계는 농촌영화 제작에 주력해야 한다. 이로써 농민의 시야와 경험을 확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시대의 흐름을 계급적으로 인지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각색자·감독이 밀접하게 연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시나리오 확보, 바로 그것이었다. 김유영은 진즉부터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의 시나리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먼저 1930년 5월11일부터 27일까지 총 9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발표한 ‘촬영소순례기-일본의 할리우드, 경도(京都, 교토)의 송죽(松竹), 일활(日活), 마끼노, 동아(東亞)를 방문하고’의 9편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해가는 만큼 원작 각색의 중요성을 더 한층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힘 있는 동지들 가운데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파악한 전문적 시나리오 작가가 나오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이어서 1930년 5월26일에는 서광제, 안석영, 이효석, 안종화 등과 더불어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를 창립해 시나리오의 대중화와 창작·연구를 도모했다. 나아가 1931년 3월26일부터 4월17일까지 총 1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게재한 ‘영화가(映畵街)에 입각하야’에서는 ‘시나리오의 본질을 구명(究明)함’을 통해 시나리오의 의미와 종류, 영화에 시나리오를 자막으로 넣는 이유 등을 조목조목 설명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김유영은 조선이 갖고 있는 특수한 정세를 객관적으로 취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써야 하며, 이 과정에서 작가·각색자·감독이 유기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내 귀한 동지들이여

김유영의 뜻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는 이종명(李鍾鳴)이었다. 이종명은 김유영의 첫 영화 ‘유랑’의 원작자로 동반작가(同伴作家)에 속했다. 동반작가란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동조하는 경향의 작가를 일렀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치면, 카프의 정식 회원은 아니나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이해가 높고, 작품 활동도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작가들을 가리켰다. 실제로 이종명은 1933년 8월8일 조선일보에 실은 ‘문단(文壇)에 보내는 말-새로운 성격의 창조와 새로운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새로운 문학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관념과 감각의 혁신이 요구된다 하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종명의 작품을 보면 등장인물들부터가 사회의 그늘을 드러냈다. 룸펜 인텔리겐챠(실업 상태의 지식인), 공장 노동자, 인쇄소 여직공, 백화점 점원 등 하나같이 곤경에 처한 도시 노동자들이 주인공인 까닭이었다. 스토리 또한 그들에게 닥친 위기 상황, 특히 궁핍이 핵심주제였다. 이를 계층에 따라 나눠보면, 하나는 ‘실직한 지식인들의 삶의 비애’이고 다른 하나는 ‘하층민들의 실직 위기’였다.

구체적으로 전자의 경우에는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성격을 가진 한 가정의 가장이 직업을 구하지 못하거나 직장을 잃어버려 생계 위기에 봉착하게 된 상황에서 삶의 비애를 술로 달래며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실직의 위기에 맞닥뜨린 도시 노동자들이 삶의 토대와 인간의 윤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엔 인간의 윤리를 저버리는 내용 이었다.

이처럼 이종명은 당시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는 작가로 다분히 현실비판적인 카프의 문학관과 통했다. 하지만 카프는 결정적으로 문학성보다는 정치성을 우위로 하는 집단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종명은 카프와 하나가 되지 못했다.

이에 김유영은 이종명과 의기투합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조용만(趙容萬)과 접촉했다. 작가 조용만은 당시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학예부장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기관지였다. 즉 조선인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해 그곳의 사원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매신(賣身), 몸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문단 내에서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용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가진 직책 때문이었다. 힘 있는 문학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서는 조용만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금의 문단을 살펴보면 문예잡지 판을 프로문학 문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들에게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권위 있는 지면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각 신문의 학예면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신문사의 학예부 관계자를 회원으로 삼아야 한다.”

학예부 관계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동아일보에는 서항석(徐恒錫,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이 학예부장, 이무영(李無影, 농민문학 대표작가)이 객원으로 있었고, 조선일보에는 염상섭(廉想涉, 자연주의·사실주의 대표작가)이 학예부장으로 있다가 나온 뒤 김기림(金起林, 모더니즘 대표작가)이 간접적으로 관계하고 있었으며, 중앙일보에는 이태준(李泰俊, 서정적 단편소설 대표작가)이 엮여 있었다. 이 가운데서 앞선 매일신보의 조용만을 비롯해 이무영, 김기림, 이태준이 힘을 보태기로 결정되었다.

#3. 구인회, 드디어 결성되다

사람을 모으는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다. 김유영을 가장 노심초사하게 만든 사람은 이효석(李孝石)이었다. 이효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김유영과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회원으로서 김유영과 시나리오 ‘화륜’을 공동 집필했고, 그 화륜을 영화로 만들 때는 편집을 맡았다. 김유영이 구성한 스틸과 함께 시나리오 ‘출범시대’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효석은 김유영의 권유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순수문학 작가로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꺼려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결국 합류하기로 뜻을 굳혔다.

그리고 김유영을 가장 낙심시킨 사람은 염상섭이었다. 당시 염상섭은 유명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논객으로서의 입지도 상당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반(反)카프의 성향이 강했다. 조선일보에 발표한 ‘계급문학을 논해서 소위 신경향파에 여함’이라는 논문을 통해 “신경향파에서 대표작이라고 밀고 있는 작품을 보았는데 참으로 미숙했다. 도대체 프로문학이 무언지 그 근본이 궁금하다”고 비웃기까지 했을 정도로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우습게 봤다. 카프에 대한 반발로 카프에 대항하기 위해 모임을 꾸리려던 김유영에게 염상섭은 논쟁을 주도하기에 맞춤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합류는 끝내 무산되었다.

이에 김유영은 1933년 8월, 자신과 이종명의 발기 하에 이태준(李泰俊·1904~?)·이효석(李孝石·1907~1942)·이무영(李無影·1908~1960)·김기림(金起林·1908~?)·조용만(趙容萬·1909~1995) 그리고 정지용(鄭芝溶·시인·1902~1950), 유치진(柳致眞·극작가이자 연출가·1905~1974) 이렇게 아홉 명으로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작가·각색자·감독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김유영론, 현순영. 구인회 형성기 연구, 안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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