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창조적 파괴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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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1   |  발행일 2019-09-11 제31면   |  수정 2019-09-11

영어 ‘disruption’이든 한글 ‘붕괴’든 파괴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파괴에 혁신이나 창조란 말이 붙으면 어감이 사뭇 달라진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가 대표적이다. 슘페터는 낡은 것은 계속 파괴하고 새로운 것은 계속 창조하면서 끊임없이 경제구조를 혁신해나가는 과정을 창조적 파괴로 규정했다. 창조적 파괴란 말을 만든 인물은 독일의 마르크스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였지만, 슘페터에 의해 전파되면서 슘페터의 용어처럼 굳어졌다. 그래서 창조적 파괴를 ‘슘페터의 돌풍’이라고도 한다.

클레이턴 크리스턴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2003년 발간한 저서 ‘혁신자의 솔루션’에서 ‘파괴적 혁신’이란 용어를 선보였다. 기존 질서 파괴를 통한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와 맥락이 같다. 공유 경제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게 다 파괴적 혁신의 산물이다. 파괴란 말은 기술 또는 산업과 접목되면 전혀 다른 의미로 전환되곤 한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최근 ‘disrupt’를 주목할 단어로 꼽고 테크놀로지와 비즈니스 분야에서 나타난 언어의 발전 사례라고 평가했다.

창조적 파괴의 효용성이 경제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외교·안보 영역까지 유효하다.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판을 새로 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는 시의적절한 조치였다. 지소미아 파기가 왜 한미 동맹 훼손인가. 오히려 일본을 두호했던 미국과 일본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우리의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지소미아 파기 후 ‘실망’을 거듭 표출하던 미국이 우릴 감싸려는 변화도 감지된다. 한미 간 간극이 벌어지는 걸 미국도 원치 않는다는 방증이다.

“일본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역시 한국은 돕지도 가르쳐주지도 엮이지도 않아야 한다.” 지난달 22일 청와대가 지소미아 파기를 발표하자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한 말이다. 한데 어쩌랴. 한국도 일본이 좌지우지하기엔 이미 너무 컸다. 대화를 거부하며 뻗대는 일본엔 굴종으로 나가면 백전백패다. 강온 양면 전략이 필요하다. 때론 기존 질서를 파괴해야 협상 테이블이 넓어진다. 이게 슘페터의 한 수다.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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