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바다인문학] 민어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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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6   |  발행일 2019-09-06 제38면   |  수정 2020-09-08
내장-젓갈, 알-어란·찜, 부레-횟감…남은 뼈는 여름보양식 일품 ‘민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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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에 묻힌 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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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회

집밥보다 맛있는 밥이 있으랴. 그런데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야 집밥의 맛을 아는 것이 문제인가보다. 추사가 유배지 제주에서 부인이 보내준 민어와 어란을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상했다는 것이 이유다. 보낸 식재료가 상하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마음이 더 상했을 것이다. 상한 마음에 집밥보다 더 큰 힘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유배지에서 하나 둘 가족을 잃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상한 마음에 어머니가, 아내가 해준 밥이 얼마나 그리웠겠는가. 금수저로 태어나 민어와 어란의 맛을 알았으니 절해고도 제주에서 그 맛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민어가 잡히지 않는 유배지 제주에서 민어를 기다리는 추사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큼직한 민어가 도마 위에 누워 있는 것을 상 앞에 앉아 상상했을 그다. 추사의 입은 짧고 까다로웠다.

여름갯벌에 산란위해 올라온 것 으뜸
잡으면 부레탓 뒤집어져 오래 못버텨
아가미로 피 뺀후 얼음에 묻어 보관
붉은살 걷어내고 남은 껍질맛도 최고
더위 지나면 간질한 후 말려서 보관

신안군 임자도어장 두개 섬 ‘타리섬’
무인도로 변해…염장한 흔적은 남아
옹진군 굴업도에도‘민어파시’형성
모래·새우 없어지며 어장도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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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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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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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부레

◆칠팔월 민어가 으뜸이다

민어는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동중국해를 비롯해 중국 발해만에서 서식한다. 조기와 서식환경이 비슷하다. 이들 지역은 모두 바닥이 뻘갯벌이다. 젓새우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민어가 좋아하는 먹이다. 수심도 깊은 곳은 100m 내외, 얕은 곳은 40m 정도다. 한국 수산지로는 목포 근해 태이도, 금강, 군산 근해, 압록강 입구가 주요 어장이라 했다. 특히 태이도는 민어파시가 섰던 임자면 하우리 앞 섬이다. 인천 굴업도와 덕적도 인근에도 민어 어장이 형성돼 파시가 형성됐다.

온 백성의 사랑을 받는 ‘민’자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속칭 ‘국민 물고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민어(民魚)’라 기록돼 있다. 전라도에서는 민어보다 ‘민애’라 해야 친숙하다.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법성포는 ‘홍치’, 완도는 ‘불둥거리’라 했다. 서울 상인들은 크기에 따라 민어, 상민어, 어스래기, 가리, 보굴치 등으로 구분했다. 민어의 고장 임자도에서는 큰 놈은 ‘돗돔’, 중간은 ‘민어’, 작은 것은 ‘통치’라 불렀다.

경남 통영이나 삼천포 건어물 가게에서도 마른 민어를 곧잘 볼 수 있다. “수입품 아니냐”는 말을 했다가 핀잔만 당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겨울에 제주와 남해 사이에서 민어가 많이 잡힌다. ‘월동민어’라 해야 할까. 진짜 보양식 여름 민어는 갯벌에 산란을 하기 위해 올라 온 민어가 으뜸이다.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법성포 목냉기에 갔다가 손가락만큼 굵은 새우를 산 채로 신주를 모시듯 가져오는 부부를 만났다. 햇볕을 가리고 안에 얼음까지 담아서 트럭도 아니고 자동차 뒷자리에 실었다. 이렇게 고이 모셔온 새우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어를 유인하는 먹잇감이었다. 민어는 죽은 새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단다. 정말 몸값 제대로 하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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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복달임

여름 보양식으로 일품은 민어탕이요, 이품은 도미탕이요, 삼품은 개장국이란 말이 있다. 삼복더위에 양반은 민어 먹고 상놈은 보신탕을 먹었다던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에 올랐던 생선이 민어자반이다. 숙종이 우암 송시열에게 하사한 것도 민어 스무 마리였다. 민어는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생선이 아니었다. 그래서 살아서 못하면 죽어서라도 해야 한다는 민어복달임이다.

생선이 다 그렇지만 특히 민어는 큰 놈이 맛이 있다. 이왕이면 수컷이 좋다. 육질타령을 하지만 제 아무리 미각을 갖고 있는 식객이라도 암치와 수치의 육질을 구별하기 어렵다. 그냥 큰 민어라면 좋다. 민어를 먹는 식객들은 활어보다는 선어를 선호한다. 활어로 가져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만들어진 식문화이기도 하다. 민어는 큰 부레를 가지고 있다. “부욱~ 부욱~” 소리를 내는 것은 짝을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부레를 이용해 바닥으로 또는 수면 가까이 오르내린다. 산 채로 배 안 물칸에 넣어두어도 뒤집어져 오래 버티질 못한다. 해서 잡자마자 아가미에 칼을 꽂아 피를 빼낸 다음 얼음에 묻어 보관한다. 선도가 좋을 때 피를 빼야 선어를 내놓을 때 깨끗하고 숙성이 되어 식감도 좋다. 민어잡이 배 냉장고는 민어숙성창고다. 그물로 잡은 것보다 낚시로 잡은 것이 더 비싸다.

민어는 내장은 젓갈로, 알은 어란이나 찜으로, 쫄깃하고 고소한 부레는 횟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등살, 꼬리살, 뱃살, 늑간살 등 부위별로 해체한다. 무엇보다 담백하고 고소한 뱃살과 다져서 나오는 갈빗살이 먼저 안주로 나온다. 물론 큰 민어일 때 가능하다. 이때 꼭 챙겨야 할 것이 붉은 살을 살살 걷어내고 나면 남는 껍질이다. 껍질에 밥 싸먹다 논을 팔았다는 민어껍질이다. 남은 뼈는 푹푹 고아서 맑은 탕을 끓인다. 탕 중 으뜸이라는 민어탕에 부레가 생명이다. 홍어애국에 애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듯 민어탕에도 부레가 들어가야 한다. 비늘 말고 버릴 게 없다.

여름철이 지나 잡힌 민어는 말려서 보관한다. 이때 간질을 잘 해야 한다. 제사상에 올릴 민어는 배를 따서 말린다. 바싹 말린 민어를 요리할 때는 물에 불리고, 반건조 민어는 그냥 찐다. 여름철 산란 직전에 잡은 민어(암치)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 중국 교역품 합죽선 ‘고려선’을 만들 때 민어부레로 만든 풀을 사용했다. 접착력이 뛰어나 천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옻칠 간 데 민어 부레간다’고 했다. 강강술래에 ‘이 풀 저 풀 다 둘러도 민애 풀 따로 없네’라는 매김소리도 있다. 부레의 교질 단백질인 ‘젤라틴’ 성분은 끈끈하다. 이를 끓이면 강력접착제가 따로 없다. 소반을 만들 때도 민어부레를 사용했다. 그래서 ‘민어가 천 냥이면 부레가 구백 냥’이라 했다. 이래 저래 민어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작은 무인도를 번잡한 홍등가로 만들었으니. 지금도 여름철이면 민어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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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의 고향 전남 신안군 임자도 타리섬(왼쪽 섬타리·오른쪽 뭍타리).

◆민어의 고향 임자도 타리섬

물때도 물때지만 태풍까지 오락가락 하면서 조업이 어려워져 송도어판장의 민어 값이 천정부지다. 큰 것은 한 마리에 도매 값이 40만~ 50만원. 같은 무게의 흑산도 참홍어 값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민어 값은 싸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이 사철 즐겨 찾았던 조기 상품이 10마리에 20전이었다. 그런데 민어가 상품 1마리에 20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어가 많이 잡혔던 어장으로는 신안군 임자도 어장과 옹진군의 굴업도 어장을 꼽는다. 굴업도는 일찍 민어가 사라졌지만 신안군 임자도는 지금도 주민들의 민어잡이가 이어지고 있다.

임자면 하우리에서 작은 배를 타고 태의도로 향했다. 주민들이 ‘타리섬’이라 부르는 곳이다. 특히 ‘뭍타리’는 우리나라에 가장 긴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신안군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과 이어진다. 타리섬은 섬타리와 뭍타리로 나누어져 있다. 모두 임자도 남쪽 하우리에 속했던 섬이다. 한때 섬타리는 8가구가 살았고 초등학교 분교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뭍타리에도 1가구가 살았었다. 마지막까지 섬타리를 지키던 주민이 하우리로 이사를 하면서 무인도로 바뀌었다. 섬타리에서 민어를 염장했다는 간독은 찾지 못했지만 부서진 흔적은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까지 어장을 하는 주민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임시 건물과 우물로 남아 있었다.

옹진군 굴업도 주변 바다는 수심이 깊고 모래밭이다. 마치 신안 임자도 주변과 비슷하다. 1920년대 초반까지 굴업도는 무인도였다. 민어와 새우어장이 형성되면서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어부들이 천여명, 어부를 상대로 음식점, 잡화상, 매춘부 등이 4천~5천명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자 인천에서 경관주재소를 설치하고 의사도 파견하였다.

굴업도에 민어파시가 형성될 수 있었던 비밀은 모래와 새우였다. 신안의 임자도와 같은 조건이다. 굴업도 남쪽으로 울도 인근 어장에서 젓새우가 많이 잡혔다. 1960년대 민어어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10여가구가 모래땅에 땅콩을 심어 생활하고 있다. 바다가 무너진 뒤 90년대 섬을 핵폐기장으로 사용하려고도 했다. 또 한 기업은 섬 땅을 대부분 사들여 대규모 골프장을 지으려고 했다.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산된다.

광복후 임자도에서 민어를 가져가던 일본인들이 사라졌다. 그 후 민어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우리와 섬타리에 가득했던 사막 같은 모래를 유리회사에서 가져가면서 사라졌다. 임자도만 아니라 굴업도를 비롯한 옹진군의 섬과 태안의 모래해안, 그리고 서·남해안의 모래언덕들이 팔리거나 파괴되었다. 모두 민어, 조기 등 회유성 어류들의 산란장이자 서식처였다.

한편으로 어류의 남획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식처의 파괴라는 폭력을 휘둘렀다. 이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런데 그 폭력을 지금 우리 세대가 되풀이 하고 있는 게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 할 때다. 섬은 인간의 고향만 아니라 어류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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