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3] 영화 ‘화륜’과 날선 논쟁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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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04   |  발행일 2019-09-04 제13면   |  수정 2019-09-04
조선인 삶과 노동쟁의 다룬 ‘화륜’ 프롤레타리아영화 논쟁 불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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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 세워져 있는 김유영 감독의 작품 ‘화륜’ 스틸컷 조형물. 영화 화륜은 도시 노동자의 고단한 생활과 노동쟁의를 그린 작품으로, 조선인의 참담한 현실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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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륜’의 촬영 개시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30년 10월21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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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의 시나리오 연재는 1930년 9월2일 끝났다. 이날 중외일보에 실린 마지막편.

#1. 카프와의 결별 그리고 서울키노 정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로부터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해산하고 카프 영화부로 가입하라는 권고가 내려왔지만, 김유영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념에 갇히지 않은 영화인 전문 집단으로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필요성을 확신한 까닭이었다. 이에 김유영은 서광제와 함께 카프를 탈퇴했고, 이 사실은 곧 언론을 통해 대외에 알려졌다.

-조선 영화예술운동에 있어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이라는 존재가 아직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바, 카프에서 전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대한 해산 권고를 불응하는 동시에 김유영과 서광제 두 사람은 카프에서 자퇴하게 되었다.-

카프를 탈퇴했다고 해서 김유영이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과 카프를 지지했다. 다만 운동의 단계와 방법에 대해 카프와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을 뿐이었다.


카프 탈퇴 후 시나리오작가협회 창립
1930년 중외일보에 ‘화륜’연작 연재
대대적 홍보에도 영화는 기대 못미쳐
1931년 개봉되자 온갖 비난 쏟아져
“반카프 반동영화·돈벌이에만 민감”
임화·서광제 등 동지들도 비판 대열



하지만 김유영은 자신이 그렇게나 지키고자 했던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서도 곧 나오게 되었다. 동맹의 분위기가 ‘카프를 구심점으로 프로 영화인들이 결속해야 한다’는 강경론에 밀려 해체 쪽으로 넘어간 까닭이었다. 실제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은 1930년 5월24일 전국대회를 열어 해산을 공표하는 한편, 카프 영화부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연이은 결별로 복잡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김유영은 서광제와 더불어 ‘서울키노’ 정비에 착수했다.

- 한동안 침체 상태에 있다가 경도(京都, 교토)의 각 촬영소에서 연구를 하고 돌아온 젊은 감독 김유영, 서광제, 문단의 김기진 등이 1930년 4월26일 오후 8시에 황금정(黃芩町) 삼정목(三丁目) 183번지 동 회관에서 서울키노를 부활시켰다.-

바로 ‘서울키노Ⅱ’였다. 이는 당연히 비난을 불러왔다. 하지만 김유영은 자신의 뜻을 밀고나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첫 단추로 1930년 5월26일에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를 창립했다. 이는 시나리오의 대중화와 창작·연구를 목적으로 서광제, 안석영, 이효석, 안종화 등과 더불어 세운 순수기술단체였다.

아울러 서울키노Ⅱ 활동 또한 독자적으로 이어갔다. 서울키노Ⅱ와 연대한다는 전제 하에 1930년 7월에 ‘평양키노(평양영화공장, 平壤映畵工場)’를 창립한 데 이어, 같은 달 19일부터는 중외일보에 ‘화륜(火輪)’ 즉 ‘불의 바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화륜은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김유영,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등이 함께 발표한 연작 시나리오였다.

#2. 뜨거운 감자, 영화 화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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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7월8일자 중외일보에는 화륜의 시나리오를 19일부터 연재한다는 알림이 게재됐다.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김유영, 이효석, 안석영, 서광제 등이 함께 발표한 이 연작 시나리오는 연재 이후 영화로 제작됐다.

화륜 연재는 1930년 9월2일에 끝이 났다. 김유영은 서광제와 이효석이 각색한 시나리오를 들고 10월10일에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 화륜은 조선인의 참담한 생활과 노동쟁의를 그린 작품으로, 도시 조선인의 참담한 현실을 담아냈다. 이를 각 언론이 자세히 기사화했다.

- 서울키노Ⅱ에서는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의 제1회 연작 시나리오인 ‘화륜’을 통영삼광영화사(統營三光映畵社) 제공, 이효석·서광제 편집, 김유영 감독, 강호 자막, 민우양·김용태 촬영으로 제작한다.-

촬영이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키노Ⅱ는 화륜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당시 서울키노Ⅱ는 일본에서 출간한 프롤레타리아 영화·연극 잡지를 재발간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표지에 영화의 스틸컷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일활(日活)’과 ‘프로키노(Pro-Kino)’에 배급한다는 계획도 알렸다. 새 영화에 대한 기대가 무성한 가운데 화륜은 1931년 3월11일에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는 이렇게 흘러갔다.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교원 길호(일부 문헌에는 ‘철호’로 표기)가 10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를 기다린 건, 아내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에게 재가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돌아온 남편 길호를 보고 고통에 빠진다. 결국 자살을 결심한 그녀는 어린 아들 편에 유서를 남긴 후 사라진다. 그리고 한강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뒤를 따라온 길호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하고 길호는 새 출발의 의지를 다지며 공장에 취직한다. 그런데 이 공장은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공장주의 횡포가 심해 노동자들의 불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설상가상 길호는 그 공장에서 한 남자와 충돌하게 되는데, 바로 아내의 재가 상대였던 덕삼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위태롭던 어느 날, 공장주가 불경기를 핑계로 임금인하와 해고를 발표한다. 길호와 노동자들이 반발하지만 공장주는 묵살한다. 거기에 사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덕삼의 존재가 불에 기름을 끼얹는다. 파업이 시작되고 폭력사건이 일어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길호는 덕삼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결국 길호는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다시 잡혀 들어간다. 파업선동죄였다.

#3.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다

화륜은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을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난과 비판까지 불러들였다.

특히 임화의 반응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임화는 김유영의 두 영화인 ‘유랑’과 ‘혼가’의 주연배우이자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의 창립을 함께 한 동지였다. 하지만 임화는 대척점에 서서 날선 발언을 쏟아냈다.

“화륜은 유치한 신파가 기계적으로 이식된 반(反)카프적 반동영화다. 본디 김유영과 서광제는 프롤레타리아영화를 만든다고 공언해놓고도 계급영화운동의 유일한 조직인 카프를 배반한 탈주자들 아닌가. 또한 화륜은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가 원작자로 돼있다. 그런데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는 카프 영화부와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세력단체다.”

아울러 “겉으로는 민족주의 지사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돈벌이에만 비상히 민감한 소매상인으로 영화적 아편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부르주아적 의미에 있어서도 결코 예술가라고 할 수 없다”고 힐난하며 “화륜의 작자는 노동자 생활에 대해 한 조각 지식도 없는 데다, 파업을 무뢰한의 편싸움 정도로 이해할 만큼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며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후 김유영과 임화, 서광제 간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광제였다.

“우리는 카프의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체 권고를 무조건 무시하지 않았다. 조선 정세에 비춰볼 때 동맹을 매개단체로서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우리가 무산계급예술운동의 일원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우리의 조직체는 언제나 카프이다.”

그러면서 영화 화륜의 줄거리가 어지럽고 불쾌하다는 비판은 자신도 인정한다며, 화륜이 원작과 다르게 부르주아 영화가 된 것과 기술적으로 실패한 것은 모두 김유영의 책임이라고 전가했다. 임화에 이어 서광제까지, 동지들의 비난에 김유영은 참담함을 금하지 못했다.

이에 김유영은 우선 서광제를 상대로 각색을 맡은 장본인이 그런 변명을 늘어놓다니 어리석다며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의 책임을 성찰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계급적인 견지에서 영화효과를 내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는 내가 감독의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려는 생각과 행동만큼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서 임화를 상대로도 반론했다.

“도시노동자와 공장주의 쟁의를 묘사하려면 반드시 선동적인 내용과 전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 경우 검열에 큰 문제가 생긴다. 과연 영화가 제대로 상영이나 되겠는가. 그렇다고 검열을 고려해 내용을 순화한다면 결코 대중에게 강한 효과를 주지 못한다. 따라서 외부 검열로 인해 삭제당하거나 자기 검열에 의해 반동적 요소를 갖게 되는 어정쩡한 선동영화보다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내용과 표현수법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대안이다.”

이처럼 극심한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김유영은 조선 프롤레타리아영화 운동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즉 카프 대(對) 비(非)카프의 분열, 자본과 검열 등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영화를 만드는 감독 아닌가.”

훤히 보이는 한계 앞에서 김유영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구인회의 안과 밖, 현순영. 향토작가연구; 김유영의 삶과 영화 세계, 이강언. 유실된 카프 영화의 상징; 김유영 론 김종원. 카프 영화와 프로키노의 전개과정 비교연구, 이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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