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구룡포읍 하정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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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9   |  발행일 2019-08-09 제36면   |  수정 2020-09-08
평온한 바닷가 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사는 ‘토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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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닿는 포구에서부터 마을의 끝까지가 반달 모양인 포항 구룡포읍 하정2리 토끼마을.

바닷가에 소나무 정자가 있다는 하정리(河亭里), 포항 구룡포읍의 남쪽 해안을 따라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일출을 보기 위해 호미곶으로 달리던 사람들이 구룡포에서 마음을 바꿔 향하는 곳이 하정리라는 소문이 있다. 그리고 단 한 번 하정리의 일출을 본 사람은 언제나 그곳의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소문도 있다. 꼭 일출만이겠나 사람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나의 그리운 바다’는 방심한 사이 벼락처럼 오기도 한다. 가령 이런 말을 불쑥 들었을 때. “날 더운데 쉬었다 가.”

하정3리 당사포
모래 한톨 없이 반들반들한 정자 마루‘당사포 쉼터’
예전 오징어 갈라 가득 널어 놓던 콘크리트 작업장
이젠 대학생들이 그려놓고 간 벽화로 마을길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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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구룡포읍 하정3리 당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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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 3리 당사포 고샅의 벽화들. 2014년부터 경북대 학생들이 그렸다.


구룡포읍에서 남하하면 하정리 마을 중 3리인 당사포(當士浦)에 가장 먼저 닿는다. 당집이 있던 곳이라고도 하고 서당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 다르게는 마을 뒤에서 보면 ‘당(堂)’자 같고 앞에서 보면 ‘사(士)’자 같다는 마을이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 ‘당사포 쉼터’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의 현판 외에 이 마을의 오래된 이름이 당사포라는 것을 알 만한 표식은 찾을 수 없었다. 정자 옆에는 ‘포스코에서 2004년에 하포정(河浦亭)을 기증했다’는 안내가 있다. ‘하정리 당사포의 정자’ 정도 되려나. 수시로 걸레질을 하는 게 틀림 없다. 모래 한 톨 없는 정자 마루가 반들반들하다.

모래사장에 꽃들이 피어 있다. 보랏빛의 저 꽃은 사철채송화인가, 노란빛의 저 꽃은 메리골드인가. 누군가 꽃씨를 뿌린 것인가, 저절로 피어난 것인가. 모래사장 한쪽에는 옥수수를 심어 놓았고 한쪽에는 파와 호박 따위가 자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안마당과 뒤란에 텃밭을 가꾸는 집들이 많다. 대개 어촌의 마당은 어부의 작업장 아닌가. 정자 옆 모래사장에 방형의 너른 콘크리트 작업장이 설치되어 있다.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하다. 회관 앞을 지나던 아주머니가 알려주신다. “아, 예전에 오징어 할복하던 곳.” ‘예전’이라는 단어가 뇌를 찔렀고, 그제야 생각이 났다. 10여 년 전 찾아왔었던 하정리는 꾸덕꾸덕 말라가는 오징어로 가득했다.

지금 마을에 가득한 것은 벽화다. 마을 뒤 언덕 위에 경북대수련원이 있는데, 벽화는 수련원에 머물렀던 학생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2014년 이곳 당사포에 처음 벽화를 그렸고 이후 방학기간을 활용해 농촌마을의 벽화그리기 봉사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그림을 그렸던 며칠간, 마을은 얼마나 시끌시끌 벅적였을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고흐의 노란 별들,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여러 애니메이션의 주인공과 활짝 피어난 꽃들이 인적 없는 고샅을 지키고 있다.

당사포 방파제 앞에 안내판이 쓰러져 있다. 거기에는 너울과 강풍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방파제 입구에 있는 박공형태의 작은 창고는 밧줄에 꽁꽁 묶여 있다. 방파제 물양장에는 천막과 이불 따위로 덮어놓은 몇몇 더미들이 있는데 밧줄에 묶인 화강석이나 바윗돌 등이 그들을 단단히 누르고 있다. 오늘처럼 평온한 바다에서 너울의 힘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깨끗한 외형의 배 한척이 모래사장 위에 부려져 있고 내항은 거의 비어 있다. 배들은 바다에서 돌아오는 중일까. 배들은 마을을 떠났을까. 모르는 사이 당사포 쉼터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날 더운데 쉬었다 가.”

하정2리 자연부락 3곳 하성, 토끼, 솔머리
어촌계 공동작업장 옆에 널린 해녀들의 고무옷
작은 내항 가득한 배, 마을 끝자락 무성한 솔숲
당나무 아래 堂神에게 놓인 막걸리와 소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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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 2리 솔머리 장군쉼터 옆의 나무. 당나무인 듯하다. 막걸리, 소주, 물이 놓여 있다.


당사포에서 해안길을 따라 내려가면 하정2리 어촌계 공동작업장이 나타난다. 작업장 옆에 해녀들의 고무 옷이 널려있다. 전부 7벌. 마을에는 최소 7명의 해녀가 살고 있다. 어둑어둑한 작업장 안에 그녀들이 주저앉아 일을 하고 있다. 얼핏, 성게를 손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정2리는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주하씨가 개척한 마을로 생긴 모습이 성을 쌓아 둔 것 같다는 ‘하성(河城)’, 토끼가 동해에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명당이라는 ‘토끼’, 바닷가 언덕위에 큰 소나무 정자가 숲을 이루고 있다는 ‘솔머리’ 이렇게 셋이다. 역시 마을에서 옛 이름의 자취를 찾지는 못했다.

내항에 배들이 잔뜩 정박해 있다. 작은 항에 적은 배들이지만 어쨌든 가득하다. 이곳이 자연부락 ‘토끼’다. 배가 닿는 포구에서부터 마을의 끝까지가 반달 모양이고 마을 어귀의 지형이 돌출해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반달은 보이는데 토끼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끝에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간 암석지대가 있다. 정수리에 솔숲이 무성하고 그 속에 정자가 보인다. 저곳이 솔머리일 게다. 정자가 있는 언덕이라 ‘일송정’이라 하고, 송정(松亭)이라고도 부른다. 정자에는 ‘장군쉼터’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 옆에는 금줄로 구획해 보호해 놓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당나무인 듯 하나 수종을 알 수 없다. 나무 앞에 ‘삼지공원의 야생화를 가져가지 말라’는 글이 달려 있다. 장군, 삼지, 당나무. 하정리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나무 아래에 막걸리와 소주와 물이 놓여 있다. 이토록이나 순정한 배려라니. 당신(堂神)은 참 좋겠다.

솔머리 너머가 하정1리 ‘임물(臨勿)’이다. 1700년경 한씨와 편씨가 개척한 마을로, 물과 인심이 좋고 많은 인물이 배출될 것 같다고 해 임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곳 역시 옛 이름을 알려주는 표식은 없다. 임물은 하정리에서 모래사장이 가장 너른 곳이다. 모래사장의 가장자리에는 여름 물놀이객을 기다리는 평상구조물들이 줄지어 설치돼 있다. 평상대여, 물놀이 용품 대여, 음식 배달 등의 글들이 길가에 가득하다. 마을에도 바다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텅 빈 바다에 조금 더 애정이 가는 것도 일종의 탐욕일까. 그런데 왜 갑자기 나옹의 시가 떠오른 것일까. 아하, 토끼마을의 어느 문간에 이 시가 걸려 있었지.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IC로 나가 31번 국도를 타고 구룡포로 간다. 구룡포읍에 도착하기 직전 병포교차로에서 하정리·감포 방향으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좌측으로 처음 보이는 바닷가 마을이 하정3리 당사포다. 남쪽으로 하정2리, 하정1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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