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한일 갈등의 뿌리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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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5   |  발행일 2019-08-05 제30면   |  수정 2020-09-08
극우 日자민당의 초대 당수
기시 노부스케, 전범 중 전범
이자의 외손자가 바로 아베
철저한 반성과 개혁도 없이
일제식민지에 대한 왜곡만…
[아침을 열며] 한일 갈등의 뿌리

지난 7월 일본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세 품목의 수출규제를 발표하더니 며칠 전에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했다. 이런 적대적 조처는 자유로운 세계무역을 파괴하는 지탄받을 행동으로 그 이유는 아마 작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노동자 배상 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보인다.

이번 한일 갈등은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역사 인식이란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답게 일제 식민지가 한국에 피해를 준 게 아니라 도움을 줬다고 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 인식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한일 갈등의 뿌리다. 기시 노부스케가 누구인가? 일본의 통산성 관료로서 만주국(1932~1945)을 이끈 주역이었다. 당시 만주국을 지배한 5인방을 ‘2키 3스케(니키 산스케)’라고 약칭하는데, 그것은 5인방의 이름이 도조 히데키처럼 ‘키’로 끝나는 사람이 2명, 기시 노부스케처럼 ‘스케’로 끝나는 사람이 3명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도조 히데키는 특히 전범 중의 전범으로 지목받아 전후 도쿄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이 집행되었다.

도조 히데키의 동료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종전 뒤 체포되어 3년간 수감생활을 했으나 운좋게 살아서 감방을 나왔다. 기시를 살린 것은 무엇보다 미국 외교전략의 변화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일본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서 다시는 파시스트들이 집권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새 나라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개혁파들은 미국 국무성에 주로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뉴딜주의자(The New Dealers)라고 불렀다. 이들은 재벌, 노동, 농업, 정치의 근본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전후 일본을 아시아 반공세력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보수파들이 미국 국방성에 포진해 있었다. 이 두 세력간의 논쟁, 갈등이 1947년쯤 오면 결국 보수파가 승리하여 미국의 외교전략이 근본적으로 후퇴하는데, 이를 ‘역코스(The Reverse Course)’라고 한다. 역코스 이후 일본의 전범 세력은 사면을 받고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변신했는데, 그 중심에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다. 기시는 자민당을 창당하여 초대 당수, 그리고 총리에 올라 보수우익의 장기집권 초석을 놓았다.

그 자민당이 지금도 일본을 지배하고 있고, 이들은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 참회한 적이 없다. 이것이 철저한 개혁과 반성 위에서 새 출발한 독일과, 반성·개혁 없이 호도하고 급발진한 일본의 차이다. 독일은 정권의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철저히 과거사를 반성, 사과해서 세계의 믿을만한 이웃이 된 반면 일본은 과거 맥아더 사령부에 대해 머리를 조아렸듯이 지금도 여전히 강대국 미국만 중시하고 한국·중국을 무시하는 왜곡된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어서 세계의 이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일본에는 사회당이나 민주당 같은 양심적 진보정당이 있어서 과거 일본 식민지배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했던 사회당의 무라야마 전 총리나 지금도 서대문형무소 터를 방문해서 사과하는 민주당의 하토야마 전 총리가 있다. 이런 진보, 양심세력의 발언권은 안타깝게도 일본 내에서 힘이 약하다.

과거 신분질서가 ‘사농공상’ 순서인 것은 한중일 공통이지만 그 꼭대기의 ‘사’가 한국·중국에서는 선비인데 반해 일본의 ‘사’는 무사다. 일본 무사는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고, 그래서 국민은 양순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일본 국민은 봉건시대 150년의 장기 전쟁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순한 민족성을 갖게 됐다. 이런 양순성은 평화시에는 괜찮지만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침략과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아직 미발달이라 일본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추동력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극우세력이 장기집권하며 잘못된 생각, 무도한 행동을 예사로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의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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