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100년 전에도 그랬다, 親日의 추억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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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25   |  발행일 2019-07-25 제31면   |  수정 2019-07-25
[영남타워] 100년 전에도 그랬다, 親日의 추억

2013년 8월13일 일본 야마구치현 신사(神社) 앞, 양복 차림의 한 남성이 두 손을 모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신사에 모셔진 인물은 에도 막부시대 제국주의 침략 이론가 요시다 쇼인(1830~1859). 서른이란 젊은 나이에 처형되긴 했지만 그는 세기(世紀)를 넘어 일본, 특히 우익세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혐한론의 원조랄까. 엄청난 조선멸시관을 갖고 있던 그는 정한론(征韓論) 주창자다.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복설’에 따라 임나일본부 재건을 주장했으며, 임진왜란의 합리적인 필연론을 펼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정명가도(征明假道) 성격이었다면 요시다와 그의 제자들은 정한(征韓), 즉 한반도 정복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 식민지배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가 요시다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날 신사를 참배하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일본 총리 아베 신조다. 평소에도 요시다를 존경한다고 말해 왔을 정도로 아베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시다가 정한론을 구체화하면서 가장 먼저 울릉도·독도 침입을 구상했던 것처럼, 아베는 2012년 2차 집권 후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야욕을 노골화했다. 엊그제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우리 영공을 침범했을 때 자위대 군용기를 긴급 발진시켰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서구 열강에 의해 개항하고 불평등 조약으로 이권을 탈취 당하던 19세기 일본을 목격한 요시다가 똑같은 방법으로 조선을 침략해 보상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처럼, 아베는 트럼프에 의해 무역압박을 당하는 21세기 일본을 보면서(혹은 트럼프가 시진핑에 무역압박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똑같은 방법으로 한국에 무역도발을 하고 있다.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패러다임이 무역패러다임으로 대체된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군국(軍國)의 추억은 진화된 방식으로 소환돼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조치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경제왜란’으로 불리는 작금의 한일경제전쟁은 여러 함의가 있다. 아베가 기술패권을 넘어 한국의 정권 교체까지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그 중 하나다. 세계경제가 국가간 협력적 분업화의 길로 들어섰지만 트럼프와 아베의 등장은 오히려 제국주의시대로의 회귀를 종용하는 듯하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이 경제전쟁의 성격을 ‘아베가 시작했다’고 정의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보복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경제질서에 대한 도발이란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와중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은 헛웃음을 짓게 하다가도 분노를 부른다. 국내 1·2위를 다투는 서울지역 두 신문이 일부 지식인, 정치인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기사로, 칼럼으로, 사설로 인과(因果)를 바꿔치기하는 궤변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의 대법관들이 첫 단추(강제징용 배상 판결)를 이상하게 끼우는 바람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일본은 치밀하게 준비해 조직적, 장기적으로 준비해 왔지만 우리는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일본보다 우리 피해가 더 크니까 현실적으로 접고 가야 한다…일본상품 불매운동은 비이성적 대응이다…자존보다 생존이 먼저다….’ 요컨대 일본이 강자이니 실리를 위해 우리 정부가 고개 숙이고 빨리 수습하란 얘기다. 기가 찰 노릇이다. ‘외교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풀지 못한 것은 문재인정부의 책임’이라는 주장에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일본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얘기를 되레 우리 정부에 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1896년 창간된 최초의 민영 일간지 ‘독닙신문’은 일본에 맞서 싸우는 조선 의병들을 가리켜 ‘비도(匪徒·도적떼)’라고 모욕하고 이완용을 애국자라 찬양하기까지 했다. 구한말 식자층은 헤이그 특사 파견과 안중근 의거를 쓸데없는 일로 치부하고 공연히 일본을 자극했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우리만 피해 입는다. 사절단을 보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는 여론까지 조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한·일 간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이 굴종적 신념(?)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지난 100년을 지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9세기의 눈으로 21세기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조선이 망한 이유를, 망국의 이유를 기억하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변종현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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