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9] 영양의 혼, 樓亭<3> 감천리 학초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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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11   |  발행일 2019-07-11 제15면   |  수정 2021-06-21 17:51
400년 세월에 주인은 바뀌어도 단아한 기품 지금도 변함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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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초정은 ‘잔디가 빛이 나서 1년에 세 번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삼수당을 박학래가 인수한 뒤 새로 이름을 붙인 정자다. 학초정에는 조병일의 ‘몽증학초정주인’등 당대 명사들의 제영이 걸려 있다.

 

한길에서도 한눈에 보인다. 반변천(半邊川) 너머 작은 들을 거느린 고아한 솟을대문과 정갈한 토석담. 대문 옆 담장 안에서부터 솟구쳐 넓게 가지를 뻗은 노송이 집안의 기둥과 창을 감추고 있다. 천을 향해 비스듬히 난 은행나무 동구길 지나 길게 쭉 뻗은 다리를 건너면 논 사이 제법 넉넉한 길이 곧게 문전으로 향한다. 솟을대문은 알게 모르게 살짝 남쪽으로 향해 있지만 대문 안 노송 뒤에 높이 앉은 정자는 제게로 오는 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정자는 일찍이 한양조씨(漢陽趙氏) 조규(趙)의 것이었고, 후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학래(朴鶴來)의 것이 되었다. 수백년을 사이에 두고 주인은 바뀌었으나 그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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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초정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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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초정의 정침. ‘ㅁ’자형 기본구조에 정면 좌우 끝으로 두칸을 더 달아 양날개집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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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방 쪽마루를 받치는 장초석에도 ‘학초정’이란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있다.
 

 

#1. 처음엔 ‘삼수당’이라는 이름으로…

땅은 천변의 범람원이다. 예부터 침수 피해는 있었지만 토질이 비옥하고 마을과 들이 나무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간 것 같아 ‘가짓들’이라 불렸다. 뒤에는 갓등산이 둘러앉아 있어 배산임류(背山臨流)하는 좋은 땅이었다. 마을 제방은 1910년경에 축조되었고 이후 보강되었다. 조규가 이곳으로 이거한 것은 조선 현종 때다. 그가 들어오면서 마을 이름은 지평(芝坪)이 되었다. 가짓들을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조규는 인조 8년인 1630년에 영양 입암면 연당리 임천동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호은(壺隱) 조전(趙佺), 아버지는 석문(石門) 조정환(趙廷)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던 그는 학문을 좋아해 한번 읽은 내용은 곧장 외웠다고 전한다. 그는 현종 1년인 166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여러 생도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거사(南州居士)’라 불렀다고 한다. 조규는 중년에 감천리 ‘가짓들’로 이거해 정자를 짓고 ‘삼수당(三秀堂)’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삼수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이곳의 잔디가 빛이 나서 1년에 세 번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한다. 조규는 삼수당에서 말년을 보냈고 집 문간에는 언제나 찾아드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2. 삼수당을 인수한 학초 박학래

박학래는 신라 박혁거세의 67세손으로 고종 원년인 1864년 4월24일 예천군 호명면 산합리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중화(仲化), 호(號)는 학초(鶴樵)다.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박준영(朴準永), 어머니는 양주조씨(楊州趙氏)였다. 집안은 원래 권문세가의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이 인조반정으로 자결한 이후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철종 대에 가문의 지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여러 대가 관직에서 멀어졌고 가난은 극복될 수 없었다. 박학래 역시 뼈에 사무치는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그에게는 다 해어진 천자문책 밖에 없었다. 그는 남의 책을 빌려 공부하거나 10리 밖을 오가며 동냥글을 배웠고, 또 글을 익히기 위해 풍기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며 공부에 힘을 쏟았다.


조선중기 조규가 짓고 ‘삼수당’편액
구한말 동학지도자 박학래가 인수
‘학초정’으로 이름 고쳐 평생 기거
동학 기록 ‘학초전’도 여기서 저술

정면3칸·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
뒤쪽 살림집 조선중기 모습 잘 간직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탐관오리가 득세하는 격변의 구한말이었다. 담대하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임기응변에 뛰어났던 그는 누구를 만나도 논리로 상대를 압도하고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하기도 한 문장가였다. 그는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언변과 문장이 뛰어났던 그는 이웃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는 관정 재판에 앞장섰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관아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거듭 승리했다. 더 나아가 그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동학군 토벌이 강화되자 예천을 떠나 경주, 청송, 영천 등지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10년경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영양 감천리의 지평이었다. 그는 삼수당을 인수해 살면서 학초정(鶴樵亭)이라 이름 붙였다.

#3. 학초정으로 이름 짓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앞쪽에 학초정이 위치하고 조금 떨어진 뒤편에 살림집인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2칸은 온돌방이고 가운데와 오른쪽 4칸은 대청이다. 온돌방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고 대청은 누마루로 높였다.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온돌방에는 사각기둥을, 대청에는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4면에는 돌출한 쪽마루를 돌렸는데 정면과 오른쪽 측면에만 계자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정면의 오른쪽 모서리에 좁은 돌계단을 두어 누마루로 오를 수 있게 했다. 쪽마루를 떠받치고 있는 동바리 가운데 몇 개는 긴 돌기둥인 장초석이다. 그중 온돌방 쪽마루를 받치는 장초석에 학초정이라는 새김이 있다.

대청의 정면은 열려 있고 측면에는 각 칸에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배면의 오른쪽 칸에는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았고 가운데는 외여닫이 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 가운데 판문 앞에는 외부로 내려서는 돌계단을 두었다. 온돌방의 대청 쪽에는 각 칸에 외여닫이문과 큰 들어걸개문을 달아 공간의 확장성을 꾀했다. 정면에는 두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광창과 외여닫이 세살청판문을 달았다. 그리고 배면에도 외여닫이 격자살문을 내어 외부와 통하도록 하였다. 학초정은 별도로 배면과 오른쪽에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을 두르고 있다. 대청 배면의 돌계단 앞의 담이 1m 정도 열려 있는데 이는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안채와 바로 연결되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의 정면 처마도리에 학초정(鶴樵亭) 편액이 걸려 있다. 오른쪽 처마도리에는 영지동천(英芝洞天), 수성연하(壽城烟霞)라 새긴 편액이 있다. 마루간 상부에는 오래되어 희미해진 또 다른 학초정 편액과 ‘도서당(圖書堂)’ 편액, 그리고 김두철(金斗喆) 등 4인의 글을 새긴 ‘차학초정(次鶴樵亭)’, 용초(蓉樵) 조병일(趙秉馹)의 ‘몽증학초정주인(夢贈鶴樵亭主人)’ 등 당대 명사들의 제영(題詠)이 걸려 있다. 온돌방 앞쪽에는 깊게 파인 방형의 구덩이가 있는데 과거 연못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학초정 뒤쪽에 자리한 살림집은 정면 9칸 측면 6칸으로 제법 큰 규모다.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정면 좌우 끝으로 두 칸을 더 달아낸 양날개집 형태를 하고 있다. 중문간의 오른쪽에 반 칸 크기의 고방이 있는데 그 옆에 반 칸 크기의 통로가 있다. 이는 안쪽의 부엌과 앞마당을 연결시키는데 이러한 출입구는 독특한 구성이다. 당우는 삼수당 조규 이후 그의 자손들이 몇 차례 중수했다고 한다. 학초 시절에도 다소의 중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부 건축양식은 일반적인 조선 중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금 학초정 및 정침은 관리되지 않아 일부 훼손되어 있다.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쓴 ‘삼수당기’를 보면 ‘산을 등지고 물과 가까운 곳에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고, 높고 맑으며 앞이 탁 트인 밝은 땅이라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하였는데, 학초정의 풍광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2014년, 박학래가 평생 경험한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학초전’이 공개되었다. 표지 안쪽에 ‘조선학생회 창립총회’ 기사가 있는 신문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이 60세 되던 1923년경 학초정에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학초전’은 한글로 저술되었으며 왜군이나 관군이 아닌 동학도 측의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 동학사에 있어서 귀중하게 평가된다. 학초 박학래는 1942년 12월12일 학초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의 시대 모순에 대항하고 타결을 위해 행동한 지식인이었고, 탐관오리의 학정에 저항하면서도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하려 애썼던 온건한 개혁가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학초전,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3, 2016.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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