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비슬산과 삼국유사

  • 인터넷뉴스부
  • |
  • 입력 2019-07-10   |  발행일 2019-07-10 제29면   |  수정 2019-07-10
[기고] 비슬산과 삼국유사
권영시(한국미래숲연구소장)

지금껏 비슬산에서 절터·석탑·등과 같은 불교유적 및 유물을 꽤나 여럿 발견했다. 이 중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여비고’ 등 고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절터도 허다하다. 설령 기록됐다 하더라도 지리적 위치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올 4월4일 영남일보에 보도된 관기봉 절터도 그 중 하나다. 나름 연구 분석한 결과 ‘삼국유사’의 ‘포산이성’조의 관기성사가 은거했던 암자 터로 추정되며, 거기서 원형석조물도 동시에 발견했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여러 차례 오갔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예사롭지 않다. 하여튼 비슬산의 절터는 대부분 억새가 무성하다. 닿고 보면 축대가 있고 위로는 평평하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석축이 흩어진 비탈에는 진달래가 빼곡하게 자란다. 절터 중간은 움푹 파여져 도굴한 흔적이 역력했으며, 원형석조물 하나만 다래넝쿨에 뒤덮여 있었다.

비슬산에서 맨 처음 발견했던 금수암지와 염불암지는 ‘보각국사비문’을 통해 연구 분석한 결과 일연이 거친 무주암과 묘문암으로 추정한다. 당시 도괴된 석탑은 흩어진 탑신을 수습해 제자리에 세웠다. 묘문암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탑신이 노반인데 하산하던 100m쯤 길섶에서 찾아냈다. 행여 여기서도 길섶에? 오랜 세월이라 길은커녕 수풀만 무성했다. 딱 하나 남은 원형석조물 크기를 실측했다. 원형면은 직경이 100㎝, 밑면은 다시 네모지게 다듬었는데 옆으로 길이가 40㎝, 전체 높이는 30㎝였다. 절터는 ‘삼국유사’의 피은편 ‘포산이성’조에 ‘機庵南嶺 成處北穴 相去十許里…’라는 글귀에 근거하여 관기성사 은거지로 확신한다.

일연이 승려 신분으로 맨 처음 주석한 포산의 보당암을 ‘삼국유사’ 집필지로 보건대 도성성사가 은거한 북쪽의 도통굴과 관기성사가 은거한 남령의 암자 중간이다. 도통굴 아래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나중에 절을 세웠다고 한 사찰이 지금의 도성암이다. 이에 반해 관기성사 은거지는 어딘가. 어느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 관기봉은 명칭이 없었던 관계로 남령으로만 표기했을 것이다. 이후 포산에는 고문헌에 조화봉·월선봉·석검봉·필봉 등 여러 봉우리가 기록됐지만, 관기성사 명칭에서 따왔을 지금의 관기봉은 헌종 7년(1841)에 편찬된 ‘현풍현 읍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고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청도군과 창녕현의 비슬산 사찰을 찾아내 분석해 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녕현 불우조에 연화사가 비슬산에 있다. 산천조에 합산은 현의 북쪽 20리에, 비슬산은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여지도서’ 창녕현 불우조에 연화사는 현에서 북쪽 비슬산에 있었는데 편찬당시는 폐사됐다. 이를 ‘동여비고’를 통해 지리적 위치를 들여다봤다. 청도군 용천사는 남령 아닌 동쪽 기슭에 있고 창녕현까지 30리, 합산은 20리다. 대신 연화사는 창녕현 북쪽 합산 등 너머 비슬산에 있다. 용천사와 합산 사이 비슬산이 된다. 이로써 필자가 발견한 절터는 합산 북쪽인 지금의 관기봉에 위치한 비슬산 연화사가 된다.

원형석조물은 석등과 불상연화좌대 또는 승탑 중 어느 부분일까. 가깝게는 대구경북 명산에 위치한 사찰을, 멀게는 광주 무등산과 조계산 사찰과 강화도 정족산과 양평군 용문산의 사찰 및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진 석조물까지 비견한 결과 석등일 가능성이 높다.

일연이 집필한 ‘포산이성’ 실제 자리는 이 정도만으로도 ‘삼국유사’의 실체를 들추어낸 수확이 된다. 관계당국끼리 협조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포산이성 문화콘텐츠’를 마련한다면 비슬산참꽃축제에 이어 ‘삼국유사’ 부분을 테마로 한 문화유산 관광이 이뤄질 것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