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원칙사회, 반칙사회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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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04   |  발행일 2019-07-04 제31면   |  수정 2019-07-04
[영남타워] 원칙사회, 반칙사회
허석윤 중부지역본부장

얼마전 3주간 호주와 뉴질랜드를 취재차 다녀왔다. 방문한 도시는 호주 멜버른, 시드니, 브리즈번, 골드코스트, 뉴질랜드 오클랜드. 그곳에 뿌리 내린 대구경북 출신 이민자들의 라이프스토리를 조명해보기 위해서였다. 잘 알려진 대로 호주, 뉴질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색이 없었다. 천혜의 자연환경, 풍부한 부존자원, 높은 국민소득, 세계 최고의 사회복지가 대표적인 키워드 아닌가.

예상대로였다. 필자가 만나본 인터뷰이들은 이민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이 이민온 것”이라고도 했다. 물론 그들 역시 이민 초기엔 엄청 고생하고 여러 차례 좌절을 겪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기회의 문’은 늘 열려 있어 본인 노력만으로 다시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필자가 느끼기엔 그들은 원체 성실하고 강인해서 이민과 상관없이 잘살았을 것 같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집안, 학벌, 스펙을 절대시하는 한국사회에선 ‘기회의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어려웠을 거라고. 반면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과 인성을 중시하는 그 사회에선 도전정신만 살아있으면 성공에 다가설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라가 진짜 좋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이민자들의 말대로 신분 차별 없이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정성과 투명성은 선진국을 대표하는 특성이자 강점이다. 물론 공정의 가치를 구현하는 게 쉽지는 않다. 누구라도, 어떤 경우에도 ‘반칙’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신뢰와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호주 같은 선진국이 그렇다. 철저하게 매뉴얼을 따진다. 원칙사회다. 공권력의 권위와 힘도 대단하다. 무슨 일이든 법과 규정대로 하니 일의 진행속도는 더디다. 이방인 입장에선 답답증을 느끼고 심지어 그들의 머리가 나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려는 그 고집이 공정사회를 구현하는 원동력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답이 너무 뻔한 물음이긴 하다. 공정,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반칙과 꼼수, 야합이 판을 친다. 국정농단, 사법농단, 특혜채용, 입시 비리, 뇌물과 성접대 등이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이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정치인을 필두로 한 권력층, 특권층이 있다. 그들의 탐욕과 갑질은 오래전부터 법과 원칙을 깔아뭉개왔다. 알다시피 특권층의 본류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전성기를 누렸다. 온갖 편법과 술수를 동원해 부와 권력을 키우고 대물림했다. 그럼에도 단죄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산다. 국민은 이런 부조리를 목도해야 했고, 이는 사회공동체의 가치관 전도로 이어졌다. 이처럼 기득권 카르텔이 퍼뜨린 권력·황금만능주의는 일반 대중까지 오염시켰다. 법과 원칙을 지킬수록 손해라는 풍토는 지금도 만연해 있다.

무엇보다 국가의 원칙마저 정권 입맛대로 변하는 게 문제다. 문재인정부는 틈날 때마다 공정과 정의의 원칙을 세우겠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정부 스스로 원칙을 어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영남권 신공항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난달 국토교통부가 김해신공항 국무총리실 검증을 수용한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신공항 입지를 놓고 대구경북과 부산이 10년 넘게 사생결단으로 싸우다 2016년 6월 김해공항 확장으로 겨우 결론이 난 사안을 다시 끄집어 내서 어쩌자는 건가. 소모적인 대립과 지역갈등만 또다시 부추기는 꼴이다. 신공항 자체만 보면 3년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정권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뀌었고, 부산·울산·경남 시·도지사가 여당 소속이란 점만 변했다. 부·울·경이 가덕도 공항 건설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시합으로 치면 선수가 경기 결과에 불복하고 자기가 이길 때까지 다시 하자고 떼를 쓰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를 수용하는 것은 정권의 이익에 눈이 멀어 국가가 지켜야 할 기본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다. 대구경북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황당한 반칙이다.
허석윤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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