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아파트공화국의 그늘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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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01   |  발행일 2019-07-01 제31면   |  수정 2019-07-01
[월요칼럼] 아파트공화국의 그늘
배재석 논설위원

“안녕하세요. 입주민 여러분. 저는 층간소음으로 고통 받고 있는 세대입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고 넘어가곤 했지만 매일 쿵쾅거리는 소리에 저희 집인데도 불구하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웃집에서 편하게 걸어 다니는 게 아랫집에선 정말 발망치 소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윗집에서 그냥 걸어 다니겠지만 아랫집에선 정말 골이 울리고 두통이 생길 정도입니다. 아이가 있는 집에는 최소한 매트를 깔아주는 게 기본예의 아닌가요. 그리고 발뒤꿈치 들고 걸을 자신 없으면 실내슬리퍼라도 신고 걸어주었으면 합니다. 다함께 사는 공동주택 다 같이 배려하고 노력해 주길 간곡히 당부합니다.”

아파트 층간소음 갈등이 정말 심각하다. 얼마전 필자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호소문이다. 공동주택이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층간소음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에 접수된 민원 건수가 2012년 8천795건에서 2015년 1만9천278건, 2017년 2만2천849건으로 늘었다. 지난해는 2만8천231건으로 전년 대비 23.6% 급증했다.

층간소음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 문제로 이웃 간에 다투다 폭행·방화·살인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사례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아파트 40대 주민이 층간소음 민원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70대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해 숨지게 했다.

층간소음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명확한 가해자 처벌 규정조차 없다.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인근소란죄로 파출소에 신고할 수 있고, 1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의 형을 부과할 수 있어도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어린이가 뛰거나 부주의로 발생하는 소음은 사실상 경범죄처벌법으로 처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송을 한다고 해도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가 소음피해를 입증해야 한다. 우리와 달리 선진국에서는 층간소음에 보다 엄격하게 대응하고 있다. 독일은 연방질서유지법상 소음규정을 위반할 경우 640만원까지 과태료를 물릴 수 있다. 미국 뉴욕에서는 공동주택 거주자가 층간소음 발생 시 관리사무소가 경고를 하고 3회 이상 누적되면 강제 퇴거 조치를 할 수 있다.

물론 층간소음이 입주자 부주의 때문만도 아니다. 감사원이 지난 5월 발표한 층간소음 저감제도 운영실태 감사 결과를 보면 아파트 시공사의 총체적 부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감사원이 지난해 말 입주 예정이던 공공·민간 아파트 191가구의 층간소음을 측정한 결과, 184가구(96%)에서 사전에 인증 받은 성능 등급보다 실측 등급이 더 하락했다. 60%에 해당하는 114가구는 최소 성능기준에도 못 미쳤다. 시공사들은 비용을 줄이려고 사전 인정 때보다 낮은 등급의 바닥구조 제품을 쓰고 평가기관은 데이터를 조작해 측정 성적서를 작성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정부는 부실시공으로 애꿎은 입주자들이 소음피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시공 후에도 소음차단 성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규모는 이미 1천만 채를 넘어섰고, 국민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로의 말처럼 ‘아파트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주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데 이만한 건축물도 없다. 하지만 편리함 뒤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는 법이다. 층간소음도 그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층간소음은 누구나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공동체 예절을 지키며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이가 있는 가정은 매트를 깔고 늦은 밤에는 뛰지 못하도록 반드시 주의를 줘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웃으며 인사만 나눠도 갈등 예방과 소통에 도움이 된다. 그래도 소음분쟁이 발생한다면 직접 찾아가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관리사무소나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환경부 분쟁조정위원회, 국토부 공동주택관리 분쟁조정위원회 등을 통한 제3자의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배재석 논설위원

배재석기자 baej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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