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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魂 樓亭 .2] 장군 오시준의 정자 감천리 연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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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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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한 장군, 애민의 현감…자연과 벗하던 선비의 기품이 깃들다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에 자리한 연소정. 조선시대 무인으로 칠원현감을 지낸 오시준 장군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은 정자이다. 연소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 한 칸을 툇마루로 개방한 ‘ㅡ’자형 누정이다.
해가 뜨고 또한 달이 뜨는 일월산(日月山)에서 반변천(半邊川)이 시작된다. 천은 태백산맥의 남북 방향을 따라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굽이쳐 흐르다가 영양군 영양읍의 남쪽에 이르러 장대한 단애를 치켜세운다. 직립한 벼랑에는 꼿꼿한 측백나무들이 창처럼 솟았고 모감주나무와 털댕강나무가 뒤따라 만군처럼 운집해있다. 단애로부터 점차 물러서 구릉을 이룬 땅에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인 감천(甘川)마을이 자리한다. 조선시대 칠원현감을 지낸 오시준(吳時俊)이 처음 터를 잡았다는 마을이다. 용맹하고 무예가 높았다는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감천으로 돌아와 단애 앞에 정자를 짓고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1. 장군 오시준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들내, 감내, 감천이라 하였다. 마을이 자리한 원래의 땅 이름은 지곡(地谷)이라 불렸는데 오시준이 정착하면서 동곡(桐谷, 東谷)이라 했다 한다. 정조 연간에는 주자(朱子)의 무이운곡(武夷雲谷)과 닮았다고 해서 운곡(雲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솟는다고 하여 감천(甘泉)이 되었다가 감천(甘川)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시준이 언제 감천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577년 9월경 감천마을의 뒷산 너머 청기면에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잠시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청계가 서당 건립을 주창하고 오시준 등 16인이 발기하여 곡물을 출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오시준의 감천 입향은 그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무과 응시 장원급제…사헌부감찰 제수
육도삼략에 통달해 전술과 전략 출중
현민들이‘송덕비’세워 선정 기리기도
임기 마치고 감천으로 돌아와 만년 보내

연소정 짓고 송강정철·청계김진과 교류
현재의 정자는 1960년 중양절에 중건


오시준의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이며 호는 미상이다. 그는 중종 22년인 1527년 영해에서 태어났다.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 장군의 손자이며, 통훈대부에 올라 광주목의 교수를 지낸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 대대로 무인 가문이었다. 그 역시 무과에 응시해 명종 17년인 1562년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그는 체력과 용맹이 대단히 뛰어났고 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하여 전술과 전략 모두에서 출중한 장군이었다고 전한다.

선조 12년인 1579년 그는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받았다. 이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높이 사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하기도 했다. 선조 17년인 1584년에는 칠원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사로 부임했다. 그는 덕으로 다스리는데 힘썼으며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현민들은 ‘오시준현감애민선정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를 세워 그의 선정을 기렸다. 또한 나라에서는 그의 자질을 칭송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웠다고 한다. 임기를 마치고 감천으로 돌아온 그는 반변천변에 정자를 짓고 소일하며 만년을 보냈다. 연소정(蓮沼亭)이다.

#2. 연소정

감천마을 앞을 가로지는 천을 따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측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직립한 벼랑에 창처럼 솟은 측백나무들이 장관이다.
감천마을 앞에서 들을 가로질러 천변으로 간다. 처음 맞닥뜨리는 물길은 움찔할 정도로 수면이 높다. 천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이 펼쳐져 있다. 숲은 감천마을에 살았던 침벽 오현병이 1959년경 무와 문예, 풍류의 수련도장으로 조성했고 후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성으로 가꾼 것이라 한다. 현재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침벽공원 혹은 감천유원지라고 불린다. 맞은편은 측백나무가 자라는 단애의 장벽이다. 이곳의 측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을 사이에 두고 단애와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아간다. 천변의 수풀 속에 매복해 있는 강태공들은 사람의 기척에도 꿈쩍 않는다.

천변의 오솔길 끝에 연소정이 자리한다. 정자의 남쪽과 동쪽으로는 반변천 물길이 지척이고 북쪽과 서쪽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의 밭을 가로지르면 감천마을과 가깝게 연결되는 위치다. 정자가 앉은 자리는 주변보다 높다. 주변을 둘러보면 정자를 기점으로 동북방향으로 지세가 조금씩 높아지는데 그러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터를 고른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의 움찔했던 수면은 이제 저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사각의 터는 돌을 둘러쌓아 흙의 유실을 막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을 올렸다. 오솔길이 가닿은 곳에 12단의 돌계단이 오르고 그 위에 사주문이 나 있다.

연소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 한 칸을 툇마루로 개방한 ‘ㅡ’자형 누정이다. 정면에는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고 안쪽으로는 모두 사각기둥이다. 좌측 두 칸은 온돌방이며 천변쪽인 우측에 대청을 두었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정면으로 네 짝 여닫이 들문을 달아 개방성을 확장시켰다. 뒤쪽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중앙에 네 짝 미닫이문을 설치해 공간을 분리한 구조다. 툇마루쪽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대청쪽에는 네 짝문,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배면의 담장에는 외부로 돌출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정자의 정면과 대청 문 위에 연소정 현판이 걸려 있다. 기백 넘치는 글씨다. 연소정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후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했으나 퇴락하였고, 연소정기(蓮沼亭記)에 따르면 현재의 정자는 1960년 중양절(重陽節)에 중건한 것이다.

#3. 공덕의 만년

감천으로 돌아온 오시준은 이후 다시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연소정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과 교류하였고 청계 김진과 의좋은 벗으로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특히 송강은 장군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당세(當世)에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연로(年老)했다. 그는 둘째 아들인 수눌(受訥)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휘하로 보내며 ‘우리 가문은 원래 세세무신(世世武臣)으로 나라님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으며, 나도 무과 급제하여 특히 손오병서를 하사(下賜) 받자왔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오늘날을 당하여, 네가 내 뜻을 대행(代行)하되 반드시 몸 바쳐 나라 위해 충성을 다하라’고 명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든 오수눌은 김성일의 막하에서 왜적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으며 영해부사의 창의에 가담하여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수십 명을 참수하기도 하였다.

장군 오시준은 광해군 5년인 1613년 감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7세였다. 1577년 청계와 함께 도모하였던 서당 건립은 해마다 곡식을 모으다 결국 오시준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638년에 짓기 시작했다. 영산서당(英山書堂)이다. 서당에서는 오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효종 6년인 1655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숙종 20년인 1694년에는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거령에 의하여 사라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현재 감천마을에는 문중에서 1800년대에 건립한 낙안오씨종택(樂安吳氏宗宅)과 구한말의 항일시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의 생가 등이 자리한다. 무예가 드높았던 장군, 덕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풀었던 현감, 물러날 때를 알고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으며 자연과 벗하였던 선비, 서당을 세워 고장의 선비를 기르고 윤리 도덕과 문풍(文風)을 떨치게 했던 공덕의 어른, 장군의 기백과 충성심을 아들에게 심어준 아버지, 이것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시준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서원연합회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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