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무위(無爲)의 즐거움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6-24 08:26  |  수정 2019-06-24 08:26  |  발행일 2019-06-24 제17면

‘장자’ ‘지락(至樂)’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리숙(支離叔)과 골개숙(滑介叔)이라는 두 현자가 천하를 유람하는데 갑자기 골개숙의 왼쪽 팔꿈치에 혹이 생겼다. 골개숙이 그 혹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 지리숙이 물었다. “자네 그 혹이 싫은가.” 골개숙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천지의 기(氣)를 잠시 빌리고 있는 걸세. 이 혹은 그 기를 빌려 생겼다네. 삶이란 먼지나 티끌이 묻음과 같단 말일세. 죽음과 삶은 낮과 밤이 있음과 같아. 이처럼 장자가 보는 삶과 죽음은 혹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문상을 간 친구 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어나기 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삶이란 없었던 것이요.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장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에 백골이 된 두개골을 보았다. 장자는 피곤해서 두개골을 베고 누웠다. 꿈에 두개골이 나타나 죽음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었다. 죽음의 세계에는 위에 군주도 없고 아래에 신하도 없지. 또 사철의 변화도 없다네. 편안하게 몸을 맡긴 채 천지와 함께 수명을 누린다네. 인간 세상에서 제왕의 즐거움인들 이에 미치지는 못할 걸세.

장자가 믿어지지 않아 물었다. “혹시 내가 생명의 신에게 부탁하여 그대를 살려 부모와 처자, 고향의 친지들에게 돌아가게 해 준다면 돌아가겠는가.” 이 말에 두개골은 심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어찌 제왕 못지않은 이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인간 세상의 괴로움을 겪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참된 즐거움(至樂)이 무엇인지 모른다. 부귀와 장수와 명예, 몸의 안락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예쁜 여자, 황홀한 음악이 참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생 이러한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허무함을 어찌 견딜 것인가. 의학의 발전으로 많은 노인이 늙고 정신이 흐려졌지만 오랜 세월 죽지 않고 살아간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이 몸뚱아리 하나 붙들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 허무하지 않으랴.

장자가 주장하는 참된 즐거움은 바로 무위(無爲)의 삶이다. 무위란 곧 자연의 질서에 순응함이다. 하늘은 무위함으로써 맑고, 땅은 무위함으로써 평안하다. 만물은 이 두 가지 무위에서 생겨나 번성해 나간다. 삶과 죽음을 무위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곧 참된 즐거움이다.

죽음교육이란 삶과 죽음을 무위로서 받아들이는 교육이다. 무위로서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면 곧 삶도 없고 죽음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이란 골개숙의 팔꿈치에 생긴 혹과 같이 온생명의 한 부분인 낱생명으로 잠시 드러났다가, 다시 온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낱생명은 파도와 같고 온생명은 바다와 같다. 파도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솟구치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편히 쉰다면 그것이 진정 참된 즐거움일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