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13] 아버지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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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0   |  발행일 2019-06-20 제24면   |  수정 2019-06-20
집에 있는 ATM…家長(가장)의 굴욕
201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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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자식들의 아버지인데, 자식들이 있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집 안에 없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자영업장에서 사장님으로 살 뿐이다. 해서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아이들이 있는 집에 들어가야 아버지가 되는데, 그들이 집에 들어갔을 때 그를 아버지로 불러 줄 아이들이 없기 십상이다. 어린 아이들이라면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테고,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 아이들이라면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 늦고, 대학생 아이들이라면 아예 나가 살거나 친구들 만나느라 집을 비우기 일쑤다. 해서 아버지들은 늦게 귀가하는 집 안에서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이렇게 지워진 아버지는, 다만 지갑이나 통장으로만 기능한다. 가정생활을 가능케 하는 수입원일 뿐이다. 그나마도 평범한 일상이 지속될 때는 그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실직을 하거나 수입이 줄어 가계를 꾸리는 데 문제가 생길 때에야 비로소 ‘무능한 아버지’로 눈에 띌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아버지는 아이들의 안중에 없다. 아이들도 바쁘다. 해야 할 공부나 연애, 취업 준비와 직장 때문에 그들은 자기 앞가림만 하는 데도 정신이 없다. 이렇게 아이들도 바쁘고 생활에 지쳐서, 어쩌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어도 말 한마디 나누려 들지 않는다. 아버지란, 가외의 용돈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면 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지갑 혹은 통장이다. 집에 있는 ATM, 돈을 벌어오는 기계나 다름없다.


자본주의 사회, 아버지는 가정의 수입원
구성원들은 돈이 필요할때만 손 내밀어
수입 줄거나 실직땐 무능한 존재로 취급

문학서도 아버지다운 아버지 보기 힘들어
전쟁·독재 등 시대 탓…자식은 못 헤아려



아버지와 아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함께 밥을 먹는 일 자체가 별로 없는 요즈음, 아버지가 아버지가 못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4월부터 공공기관과 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지만 사정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의문이다. 그 외 사업장의 직원이나 자영업자들에게는 그마저도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으니, 국가 전체로는 큰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직장생활이 근로시간에 한정되지 않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2004년부터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어 그 전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 줄 아이들이 바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해서 상당수 대한민국의 가정에는 아버지가 없다.

따져 보면, 아버지가 없는 상황은 역사적이다. 우리나라 현대사 전체에 걸치고도 남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식민지 시대의 한국문학이 보이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 하나가 ‘고아 의식’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면 고아인 경우가 적지 않다. 기대고 의지할 아버지는 물론이요 지갑 역할이라도 해 줄 아버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있는 경우도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건강이 안 좋은 아버지, 배운 것 없이 고생만 하는 아버지, 술을 먹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정도에 불과해서, 기대고 의지할 수도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아버지들뿐이다. 해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진짜 고아가 아닌 경우에도 고아 의식을 갖는다. 아버지가 아예 없거나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우리나라 문학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는 여러 모습으로 한국문학에 존재하지만 아버지는 대체로 지워져 있다.

왜 그럴까. 백 년이 넘는 역사 내내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들이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사정은 이 글 첫 부분에서 말한 것과 또 다르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 독재의 정치 상황과 그 기간 내내 크게 변하지 않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은 아버지다울 수 없었다. 남에게 굽실거리는 아버지, 따뜻한 밥은커녕 세 끼니를 제대로 이어 주지 못하는 아버지란 아버지이기 어렵다. 이런 무능한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든든함과 위엄을 갖출 수 없었다. 아버지들의 무능함이 시대와 상황의 탓인 건 분명하지만, 어린 자식들은 그런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해서 한국 현대사 내내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박범신의 소설 ‘소금’(한겨레출판, 2013)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 그려지는 아버지는 다섯이다. 1951년생 주인공 선명우가 첫째. 회사의 상무이사로 직장과 집밖에 몰라 별명이 ‘통근 버스’이고, 집안에서는 ‘있으나 없으나 한, 흐릿한 사람’(36쪽)으로서 숙맥을 모른다고 ‘쑥 아빠’로 불리며 아내와 세 딸의 뒷바라지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다. 둘째는 그의 부친 선기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아들 하나를 대학생으로 만드는 데 목숨을 건 불쌍한 아버지다. 선기철의 부친이자 선명우의 조부가 셋째. 자신은 고된 일을 하지만 자식은 출세하라고 대처로 보내는 아버지다. 선기철도 이러하고 사실 우리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이 또한 이러하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아버지이다. 넷째는 서술자인 박 시인의 아버지. 가난한 농사꾼이었다가 아이 공부시키자는 아내의 말에 군산으로 와 부두의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치사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내다 사고사로 생을 마감하는 무능력한 아버지이다. 이 또한 서민들의 초상. 다섯째는 다른 유형이다. 군인 출신으로 군사 정권하에서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아들을 못 얻은 분을 딸에게 풀어 불구로 만든 윤선미의 아버지. 드물지만 어엿이 존재하는 성공한(!) 아버지다.

물론 ‘소금’의 의도가 우리나라 아버지들의 유형을 보여 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선명우가 불현듯 가족을 버리고 야인이 되어 자기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뼈대다. 그가 가족을 떠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을 위해 인생을 버리고 끝내 염전에서 일을 하다 숨진 부친의 기억, 기업의 임원이 되기까지 스스로 지워버렸던 아버지의 기억이 우연히 환기된 까닭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과 기묘한 가족을 이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선명우의 이후 삶은, 그런 자기 아버지에 대한 속죄의 길을 걷는 것이자, 이전의 가족에서 지워졌던 자기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사는 것이다. 그의 막내딸 선시우가 늦게 깨닫는 대로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그냥 사람이었다는 것”(209쪽)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선명우의 이러한 행적을 통해, 그리고 앞서 열거한 아버지들의 삶을 통해서 박범신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아버지가 아버지일 수 없게 만드는 소비자본주의 사회, 가족 구성원들이 아버지에게 ‘빨대’를 꽂고 그를 착취하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지면 요양원으로 보내 버리는 ‘철저히 불공정한 비윤리적 거래’(333쪽)가 만연한 사회, 거대한 소비 문명이 아버지와 아이들을 이간질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소설 ‘소금’의 중심 주제다. 그 비판의 대안은? ‘자본주의적 체계의 정교하고 잔인한 프로그램에서 놓여난 삶’(224쪽), 과도한 소비 풍조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며 사는 삶이 ‘소금’이 보여 주는 대안이다.

이 소설을 통해 박범신이 동의를 구하는 것은, 돈만 좇고 소비생활을 앞세우는 우리들의 잘못된 삶의 질서야말로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존재할 수 없게 된 주된 이유라는 사실이다. 안 해도 좋을 과도한 소비가 만연한 사회 풍조 때문에, 각 가정의 아버지가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집 바깥에서 인생을 소진하고 집안에서는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아버지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이 박범신의 ‘소금’이다. 이를 두고 뜬금없다 할 것인가. 성차별이 여전한 현실과 동떨어진 망발이라 할 것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말 때문에 ‘소금’의 말이 지워질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1970년대 이래 한국소설에서 어머니가 발굴되었듯이, 아버지도 발굴될 필요가 있다. 2019년이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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