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주 수도리 무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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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4   |  발행일 2019-06-14 제36면   |  수정 2019-06-14
저 ‘외나무다리’는 300여년 바깥세상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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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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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우당 고택. 1876년에 지어졌으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너른 모래톱 위로 태양이 전능의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톱은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강을 깊이 베어 물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은 단조롭고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것은 저 태양이라는 듯 실눈을 뜨고 반짝였다. 대양과 모래톱과 강의 모진 사랑이라 할 만했다. 그들 사이로 외나무다리가 건너오고 있었다. 대담하게 태양빛을 뚫고 주저하면서, 혹은 춤을 추듯이 강을 건너더니 모래톱 위로 까무러치듯 내려앉았다. 둑 위로 몰려나온 지붕들이 반달 같은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발굽 모양으로 마을 감싸 흐르는 내성천
장마지면 다리 떠내려가 해마다 새로 놓기도
한명 지나갈 폭, 중간쯤 양보하는 비껴다리
기와·초가 지붕 어우러진 국가지정문화재
마당에, 골목에,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은 밭
배움의 장이자 항일 운동의 거점 ‘아도서숙’


◆무섬마을

내성천(乃城川)이 말발굽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흐른다. 천 너머에서 바라보면 마을은 물 위에 뜬 섬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은 수도리(水島里), 우리말로 무섬마을이다. 수도교 건너 무섬으로 들어간다. 천을 건너고 모래톱을 가로질러 무섬의 둑에 닿으면 둑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무섬의 집들이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을 산다. 몇몇 방문객들이 보인다. 그들은 마을 안 식당에 앉아 있거나 둑길을 걷는다.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옛날 무섬에 처음 들어온 이는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수(朴)다. 그는 무섬의 서쪽 건너 마을인 머럼(머름, 원암, 遠岩)에 살다가 결혼 후 분가해 강 건너 이 땅을 개척했다. 현종 7년인 1666년경이다. 그가 건립한 만죽재(晩竹齋) 고택이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이후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대(金臺)가 영조 33년인 1757년에 처가 마을인 무섬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무섬은 김씨와 박씨 두 집안의 집성촌이다. 구한말에는 120여 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줄면서 마을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은 50여 가구에 100여명의 주민이 산다.

무섬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기와지붕과 초가지붕들이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있다. 이 중 100년 넘은 집이 16채, 문화재로 지정된 집이 9채다. 수도교 건너 가장 먼저 만나는 집은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187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金樂豊)이 지었다고 한다.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 밭이 있다. 마당에, 골목에, 아무리 작은 땅이라 해도 무엇이든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은 모두 밭이다. 옛날부터 마을 안에는 농지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을 건너가서 농사를 지었다. 한때는 마을 소유의 토지가 30리 밖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 마을의 밭에는 채소가 자라고 또 무엇보다도 꽃이 자란다. 눈 닿는 곳마다 꽃이다. 마을은 뜨겁게, 뜨겁게 제 빛깔을 뿜어내는 여름 꽃밭이다.

◆아도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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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에 내려앉은 외나무다리 기둥에 풀들이 엉겨 숨어 자라고 있다.



수도교에서 왼쪽으로 조금 가면 현판도 없고 피부도 말간 건물 하나가 높직이 자리한다.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았지만 간직한 역사 깊은 ‘아도서숙(亞島書塾)’이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의 줄인 말이고, ‘서숙’은 옛날 서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도서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해우당의 증손자인 김화진(金華鎭)이 세운 학교다. 반상과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가르쳤고, 학생들은 영주 청년동맹,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농민조합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아도서숙은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단결의 장소’였고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일제는 아도서숙이 생긴 이후 5년간 세 차례나 마을을 포위한 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을 붙잡아 갔다. 결국 아도서숙은 개교 5년 만인 1933년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다. 김화진은 투옥과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직후 숨을 거뒀다. 무섬마을에서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이는 다섯이다. 김화진, 김종진(金鐘鎭), 김계진(金啓鎭)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김성규(金性奎), 김명진(金命鎭)이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아도서숙에 대한 안내글 중 ‘한 포승(捕繩)에 묶여 피눈물을 흘린 마을공회당이 아도서숙’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 마당에 천진한 풀꽃들 가득하다.

◆외나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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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톱에 내려앉은 외나무다리 기둥에 풀들이 엉겨 숨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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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무섬마을에는 뜨거운 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수도교에서 오른쪽으로 둑길을 따라가면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1983년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옛날에는 영주 시장에 갈 때 이용했던 ‘뒷다리’, 수도교 자리에 있었던 학교 갈 때 건너는 다리, 그리고 ‘놀기미논’으로 들일하러 나갈 때 건넜던 ‘놀기미다리’, 그렇게 세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내성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갔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새로 놓았다. 독립을 위해 피 흘렸던 청년들이 ‘한 포승에 묶여’ 그 다리를 건너갔다.

현재 마을에는 두 개의 외나무다리가 있다. 한옥체험관 앞쪽에 있는 짧은 다리와 마을 앞쪽에 ‘S’자 모양으로 놓인 다리. 다리는 원래 직선이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외나무다리축제’를 하며 형태를 바꿨다고 한다. 외나무다리는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과거에는 더 좁았다고 한다.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고속도로라는 말도 있다. 외나무다리 중간마다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에서 마주치면, 누군가는 ‘비껴다리’에서 길을 양보한다.

다리를 건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디선가 큰 소리 울린다. ‘균형을 잘 잡아야 해.’ 다리를 건너 무섬마을을 바라본다. 시인 조지훈의 아내는 무섬마을 사람이었다. 그는 가끔 무섬으로 들어와 모래밭을 거닐었다고 한다. 그가 이곳을 배경으로 쓴 시가 ‘별리(別離)’다.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 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모래톱에 내려앉은 외나무다리 기둥에 풀들이 엉겨 숨어 자라고 있다. 너희들도 기댈 곳이 필요했나, 너희들도 말 없는 슬픔을 가졌나. 노란 꽃들이 피어난 둑 너머로 무섬마을의 지붕들은 웃고 있는데.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영주IC로 나가 장수교차로에서 우회전한다. 장수면사무소 지나 우회전해 반구교를 건너 반구로를 따라 간다. 문수농공단지 지나 다시 우회전해 적서로를 따라 직진하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문수로를 타고 가다보면 왼쪽으로 무섬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무섬로 타고 가다 수도교를 건너면 무섬마을이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주차장이 있다. 마을 안에 식당도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도 한옥체험관 근처에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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