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박정희의 구미 산업단지가 추락하고 있다는데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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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05   |  발행일 2019-06-05 제31면   |  수정 2019-06-05
[박재일 칼럼] 박정희의 구미 산업단지가 추락하고 있다는데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경기도 화성시가 배경이다. 화성은 90년대까지만 해도 황량한 들판에 으스스한 살인사건이 다반사로 일어나던 곳이다. 근 20년 전 경북 구미 인구가 34만명일 때 화성은 인구 21만명의 농촌도시에 불과했다. 작금의 화성시는 구미 인구(42만명)의 근 2배인 81만명에 동탄신도시를 낀 전국 최다의 기업체를 보유한 산업도시로 급성장했다. 1인당 총생산은 8천만원을 넘었다. 지난 1일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곳도 화성사업장이고,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한 곳도 여기다.

대구의 기업 대표들을 만나 물어보면 공장이 구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집은 대구 수성구인데 구미로 출퇴근한다. 한때 삼성전자가 구미에서 한창 공장을 돌릴 때는 매일 수백대의 출퇴근 버스가 대구~구미를 오간 적도 있다. 구미에서 일하고 주말이면 대구 와서 쇼핑하는 이들도 많았다. 구미에서 뿌려진 한국은행 신권 지폐가 대구에서 수거되는 구조다.

구미는 포항과 함께 대구의 산업 위성도시다. 1인당 총생산이 30년째 전국 꼴찌인 대구가 그나마 망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모르긴 해도 이들 위성도시 때문일 게다. 통계청 최신 집계가 증명한다. 대구의 총생산 대비 총소득 비율(기준 100·2017년)은 119.8로 전국 1위다. 유입되는 돈의 비중이 가장 많다는 의미다.

대구와 40㎞ 남짓 이격한 구미는 딱 50년전 1969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가 탄생한 곳이다. 5개 국가산업단지에 도시 명운을 건 기업도시다. 전국 최대 수출기지로 6만달러의 초특급 소득을 자랑했다. 이런 구미의 산업단지 가동률이 전국 최하위로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지난 1분기 구미산단 가동률은 불과 65.9%로 전국 평균 76.9%에도 한참 못 미쳤다. 50인 미만 중소업체 가동률은 34.8%로 거의 빈사상태다. 경제신문은 산업단지 사무실에 문을 닫은 기업에 보낸 반송 우편이 수북이 쌓여 있다고 르포 기사를 통해 전했다. 자고 나면 폐업하는 공장이 부지기수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 자칫 미국의 ‘러스트벨트’처럼 악몽의 공업도시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구미의 추락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산단 가동률은 2010년만 해도 87.9%로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2012년, 전국 평균을 하회하면서 내리막길을 달렸다. 그 시점이 묘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해다. 구미산단은 구미 선산이 고향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시대 산물이다. 창원, 울산, 포항, 여수와 함께 박정희가 설계한 도시다. 아버지가 구상한 산업도시가 딸의 시대에 추락하기 시작했다니 아이러니다.

구미의 위기에는 물론 다른 근본적 이유가 있다. 일전에 이 칼럼에서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를 소재로 쓴 적이 있다. 서울 한남대교에서 신탄진까지 버스전용차로가 있는데, 한국의 산업분포 남방한계선이 딱 여기까지라는 의미였다. 신탄진 아래 정확히 말하면 추풍령 아래로는 이제 기업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 헛물켰던 하이닉스가 구미로 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있던 대기업도 떠났다. 삼성이 대표적이다. R&D(연구개발)는 수도권으로 가고, 껍데기 조립공장만 남았다. LG화학이 ‘구미형일자리’란 포장으로 2차전지 공장을 구미에 짓는다는데 글쎄, 이것도 와야 진짜 오는 것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취임 후 첫 최고위원회의를 구미에서 한 것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보수정권 10년에 구미를 이렇게 망가뜨렸다는 일종의 시위 아닌가 하는 그런 상념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장세용 구미시장은 경북에서 유일하게 민주당 단체장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 구미에서 내년에 출마하겠다며 누비고 있다. 집권 여당이 구미를 파고드는 데 마다 할 이유는 없겠지만 앞선 버스전용차로의 구조를 보면 낙관하기 어렵다.

화성은 지금 100만 도시를 자신하며 달린다. 이유는 없다. 바로 서울 옆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구미를 보면 대구가 답답하다. 답답한 대구에 생각이 미치면 대한민국 지방이 또 답답하다. 어쩌면 지방민이 총궐기, 들고 일어나야 불균형의 이 질곡을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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