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어린 의뢰인’의 절규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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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03   |  발행일 2019-06-03 제31면   |  수정 2019-06-03
[월요칼럼] ‘어린 의뢰인’의 절규

2013년 8월 칠곡군의 한 가정에서 8세 여자 아이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내부 장기파열. 사망한 아이의 언니는 자신이 동생을 폭행했다고 곧바로 자백했다. 그렇게 사건의 실체는 묻히는 듯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계모가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한 후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밝혀졌다. 언니 입을 통해 알려진 계모의 자매 학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청양고추를 억지로 먹이고, 계단에서 밀어 넘어뜨리고, 욕조에 물을 받아 기절할 때까지 거꾸로 머리를 집어넣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동생의 등에 뜨거운 물을 붓고 세탁기에 집어넣어 돌리기도 했다. 이 사건이 바로 당시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건이다. 지난달에는 이 사건을 소재로 아동학대 실상을 고발한 영화 ‘어린 의뢰인’이 개봉돼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 다 됐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의뢰인’의 절규는 진행형이다. 영화 속 계모처럼 “내 새끼 내가 때려죽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자녀를 학대하는 일이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진다. “오늘 따라 좀 심한데?” “남의 집일에 신경 쓰는 거 아냐. 우리 애한테나 잘해”라며 애써 외면하는 아랫집 부부의 모습도 현실과 다르지 않다. 이를 뒷받침하듯 지난해 아동학대 건수는 2만4천433건으로 2014년 1만27건과 비교하면 5년 새 2.4배 늘었다. 특히 지난해에만 30명이 희생되는 등 최근 5년간 134명의 아이들이 온갖 학대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린 시절 매를 맞거나 정서적 학대를 받은 아이는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자라면서 공격성향·인지장애 등 인격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학교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을 낳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는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했다. 실제로 한국보건연구원의 연구보고서에는 아동기에 학대와 폭력 등 부정적인 경험을 한 성인 중 41.6%가 자녀를 학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미국 하버드대 연구 결과 어릴 적 받은 학대로 특이하게 변형된 DNA는 자손에게 전해져 정신질환 유발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 아동학대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발생한 아동학대의 76.7%가 부모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는 부모의 체벌이 ‘내 아이는 내 방식으로 교육한다’거나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준다’는 말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최근 정부가 민법상 ‘친권자 징계권’ 조항 중 아동체벌을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한 것도 자녀에 대한 부모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안전과 인권을 개인이나 가정·학교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정부 차원의 보호시스템을 강화하는 일이다.

가정에서의 단순학대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살해자살’이다. 가정의 달인 5월에만 경기도 의정부에서 가장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고등학생 딸 등 일가족 3명이 숨지는 등 3건의 ‘살해자살’이 일어났다. 이처럼 살해자살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기는 가부장적 사고가 우리사회에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살해자살은 명백한 살인행위다. 아이의 생명권을 빼앗을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100년 전 어린이운동을 펼친 방정환 선생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라’고 외쳤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칼릴 지브란은 잠언집 ‘예언자’에서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큰 생명의 아들 딸이니/ 그들은 당신을 거쳐서 왔을 뿐 당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소유는 아닙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당신의 생각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지만, 그들을 당신과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십시오’라고 읊었다. 아이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이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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