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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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31   |  발행일 2019-05-31 제41면   |  수정 2019-05-31
해지면 커피 대신 맥주, 유원지 강바람에 녹아드는 선곡 ‘감성발전소’
쌍둥이 형제가 그린 밑그림 ‘멀티카페’
사촌지간·며느리·손자까지 의기 투합
손때 묻은 LP 덕분, 아들 세대와 통합
소장한 음향장비 덕 80년대식 뮤직박스
[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쌍둥이 형제 이선형·후형씨가 애지중지하던 그 시절 LP 음반 앞에 선 사촌들. 왼쪽부터 LP펍 런던보이즈 대표 재창·총괄매니저 재영·커피숍을 맡은 재준씨.

그 가족은 참 수상하다. 그래 ‘수상한 가족’이다. 그들이 동촌유원지에서 색다른 사고를 치고 있다 해서 달려가봤다. 동·북쪽 전면 3층벽은 통유리창, 남서쪽 외벽은 화이트톤. 동남쪽 모서리엔 정방형 매머드 포인트 현수막에 영문자 D를 현대감각에 맞게 염직해 놓았다.

큰·작은 아버지·사촌·며느리·손자까지, 모두 8명이 의기투합했다. 이 수상한 가족은 동촌유원지에도 제대로 된 랜드마크 하나 정도는 만들어야 된다는 각오로 음악·수제맥주·커피라인을 LP가 신경망처럼 연결해주는 신개념 멀티카페 스타일의 ‘인스퍼레이션 디(Inspiration D)’를 지난해 9월 오픈했다. 이 집안은 오랫동안 ‘동촌양조장집’으로 회자됐다. 그리고 지금 이 공간이 가능하게 밑그림을 그려준 사람은 쌍둥이 형제 이선형·후형. 둘은 나름 동촌의 전설이다. 형은 음악에 미쳤고 동생은 돈키호테 같은 야심가였다. 청구대 출신이었던 형은 친구 이상연, 신무홍 등과 ‘트윈보이스(Twin boys)’란 4인조그룹사운드를 결성하고 거기서 베이스와 보컬 파트를 맡았다. 1968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대학생 재즈 페스티벌(3회) 본선에 진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형은 잠시 대구 캠프워커 근처 클럽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그후 동생과 ‘쌍둥이 상사’라는 상호로 사업을 했지만 실패. 1999년 동촌유원지에서 재기하기 위해 라이브클럽 ‘참새와 허수아비’를 연다. 형은 노래하고 동생은 모닥불을 피우고 손님에게 군고구마를 건넸다. 툭하면 의견충돌이었지만 그게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형제는 양조장 사장인 아버지의 재력 때문에 대구에서는 상당히 일찍 LP뮤직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전축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그 음반과 음향장비를 버리지 않고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업장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선의 이미지를 살린 카페 2층의 명물인 스탠드 존에서 바라다 보이는 싱그러운 동촌유원지 숲.
[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커피와 잘 어울리는 수제 피칸파이와 레몬파운드케이크.
[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우중충하고 무질서하게 서 있던 기존 상가를 모던하게 변모시켜 이 유원지 랜드마크로 떠오른 멀티카페, 인스퍼레이션 디의 외관.

◆LP펍 런던보이즈

쌍둥이 동생의 둘째 아들 재창씨도 LP광. 그는 부모가 사용하던 올드버전의 LP에 자기 손때가 묻은 LP를 섞었다. 여기 LP는 덕분에 세대통합 될 수 있었다. 2천여장의 LP, 1천500여장의 CD가 있다. 그는 3층 건물 곳곳에 자기 집안의 LP연대기를 단골에게 제대로 각인시키기 위해 가지런하게 진열해뒀다.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주요 포인트마다 진열대를 놓고 거기에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각종 음반을 꽂아놓았다. 3층에 가면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은 감상실이 있다. 단골에겐 거기가 1980년대식 음악다방의 뮤직박스처럼 느껴진다.

언뜻 래퍼 포스인 그는 못말리는 ‘여행광’. 1년에 1번 정도는 해외 수제맥주여행을 떠나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전에도 구스아일랜드, 브루클린, 밀워키 밀러, 사무엘아담스 등 미국의 주요 도시 브루어리를 투어했다. 그는 한때 맥도널드 점장으로도 일했다. 고깃집 매니저 경험도 있다.

낮에는 1~3층까지 커피가 빛을 발한다.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커피 자리에 맥주가 들어찬다. 1층 남쪽 언저리에 있는 ‘런던보이즈(London boys)’. 밤이면 이 유원지의 정서를 쥐락펴락하는 ‘감성발전소’로 변한다. 강바람을 더욱 쿨하게 반죽한다.

친구 박병길씨도 맥주와 LP가 좋아 그와 손을 잡았다. 둘은 서쪽으로 난 접이식 문을 활짝 열 때가 가장 행복하다. 세계적 리조트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노천카페의 뮤직, 그게 관광객의 맘을 어루만져주는 신의 한수라는 걸 둘은 너무 잘 안다. 그런 풍경을 대구에서도 연출해 보고 싶다. 그는 늘 노래의 색깔이 가진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 비욘세, 레이디가가, 아델, 콜드플레이, 스팅, 머라이어캐리, 영국의 부자 뮤지션인 에드 시런, 퀸의 명곡 등을 푼다.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그 음악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맥주를 주문하면 둘의 행복지수도 업된다. 특별한 손님이 오면 그들의 취향을 섞어야 한다. 감성적일 때, 분위기를 업시켜줘야 할 때, 조금 일어서 가볍게 몸을 흔들 수 있게 하는 비트감 좋은 곡들…. 국내가요도 LP판버전이면 튼다. 김광석, 장기하, 이문세, 백지영, 버스커버스커, 박효신, 이적, 김동률, 박정현, 이소라…. 제대로 된 선곡안이 없으면 이 장사는 빨리 접어야 된다.

아마존, e베이, 유명 LP사이트인 디스코스 등을 통해 음반을 직구한다. 1년에 6번 정도는 일본으로 가서 레코드숍 순례도 한다.

그는 자기 음악에 맞는 맥주를 권한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 선택한 수제맥주 13종을 리스트업시켰다. 독일의 밀맥주 ‘아잉거’는 대구에선 맛보기 힘든데 여기 오면 먹을 수 있다. 이밖에 구스아일랜드 312와 IPA, 1996년부터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들의 맥주를 세상에 내어놓기 시작한 ‘발라스트 포인트(Ballst Point)’의 라인업 중 스컬핀을 강추한다.

[이춘호기자의 LP로드] 동촌유원지 ‘인스퍼레이션 디’
밤이 되면 동촌유원지 분위기를 모던하게 바꿔놓는 LP뮤직 가득한 런던보이즈 바텐에 나란히 앉은 재영·재창·재준씨.(왼쪽부터)

◆골퍼강사인 재준의 꿈

여느 공간과 달리 여긴 모든 층의 인테리어가 각기 다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에 유원지와 금호강의 풍광을 스포츠경기처럼 관람할 수 있게 나무판으로 짜놓은 스탠드가 있다. 1층은 점, 2층은 선, 3층은 면을 모티브로 디자인을 했다.

이 공간의 시공과 인테리어 전반에 개입한 건 쌍둥이 형의 장남인 재준씨다. 그가 총괄매니저인 셈. 그의 삶도 다양한 색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엔 바이올린에 빠졌다. 건강이 안 좋아 골프에 입문했고 고교 때 선수로 뛰게 된다. 89년에는 전국체전 대구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계명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동촌골프클럽에서 프로 골프강사 생활을 했다. 2000년대 초 부모 사업을 도와주면서 본격적으로 외식업의 감각을 익히게 된다. 그는 이때 국내에 첫 론칭돼 광풍을 일으키고 있던 스타벅스에 심취하게 된다. 이 브랜드는 이마트 그룹을 통해 사업을 전개한다. 당시 만촌 이마트에서 스타벅스 원두와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해 아버지가 꾸려가던 찜질방 매점에서 그 커피를 팔았다.

찜질방은 이내 칸타빌레란 레스토랑으로 변모하게 된다. 재즈와 클래식 공연을 주말마다 전개했다. 동촌유원지에 울려퍼진 최초의 재즈사운드를 그가 기획한 것이다. 부모님의 사업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외식업계의 급격한 지형변화에 부모가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촌 동생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을 하나로 묶으면 새로운 사업이 태어날 것 같았다. 일단 건물 디자인이 중요하다 싶었고 괜찮은 디자이너를 찾았다. 닥터주스, 설 어니언(Sir onion), 헐그리 등의 브랜드를 론칭한 옛 골프 제자 박철은이 소개한 디자인 회사 ‘아이디어 DO IT’ 안예록 대표와 손을 잡았다.

공사 직전 우연히 알게 된 일본 도쿄 츠타야 서점에 가서도 큰 감명을 받았다. 책장을 숲처럼 만들어 놓고 그 책장 사이에 의자를 배치해놓았다. 곳곳에 트렌디한 물품을 자연스럽게 구매할 수 있게 내추럴한 동선을 만든 것에 크게 놀랐다. 도쿄로 가서 매일 오픈 때부터 마감까지 머물면서 고객들을 행복하게 해 줄 힌트를 메모지에 적어나갔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법을 거기서 조금 배울 수 있었다.

평소 편의점과 커피숍, 횟집 등이 무질서하게 입점해 있던 ‘ㄱ’ 자 건물을 완전히 혁파했다. 서쪽 건물 중간을 남북으로 뚫어 행인이 다닐 수 있게 했다. 전체적인 디자인라인은 중구 삼덕동에 있었던 인스퍼레이션 디를 많이 벤치마킹했다. 하지만 이 유원지에 맞는 포인트를 첨가했다. 음악적 쾌감이 영감으로 이어지도록 색깔과 모양, 동선을 잡아나갔다.

1층에는 소방법에 저촉이 안되게 유리로 된 100여개의 정방형 클래스 박스를 부착했다. 천장의 직선감을 상쇄하기 위해 소파라인은 원형으로 갔다. 층별 주조색도 마련했다. 1층은 녹색, 2층은 블루, 3층은 와인빛이었다. 계단을 훑는 컬러는 분홍색. 외벽의 흰색, 그리고 그것과 앙상블을 이루는 붉은 벽돌은 스타코 공법으로 건물을 감싸주었다.

이들 가족이 핸들링하는 건 인스퍼레이션 디만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옆 언저리에 추억의 비디오 라벨을 연결해 만든 메뉴판이 인상적인 숯불가든도 차렸다. 쌍둥이 형의 아내는 커피 마니아. 조만간 로스팅된 커피를 원목 바닥이 포근하게 깔려 있는 3층 스페셜티 바에서 핸드드립해 팔 작정이다. 여기 라떼는 나름 입소문이 나 있다. 그 소문에 만족하지 않고 늘 재영과 재준씨는 커피담론을 이어간다. 당도를 낮춘 피칸파이와 레몬파운드케이크는 직접 만든다.

그 카페와 가든, 그리고 해맞이 잔디광장, 금호강과 유원지 숲, 버스킹 공연 등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근처 인터불고호텔에 투숙한 외국인이 자연스럽게 여기로 와서 대구만의 정서를 소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한 가족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빅 프로젝트 이름은 강과 음악이 빛과 공존하는 ‘그라운드 동촌’이란다. 동구 효동로 6길 57. (053)952-7711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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