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울진 선구리 백암산 신선계곡

  •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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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31   |  발행일 2019-05-31 제36면   |  수정 2019-05-31
백색 바위 기대 아찔하게 검푸른 ‘마음소’…감은 눈속에서도 깊어지는 ‘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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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 혹은 마음소. 주변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국이다.

너무 깊은 것, 그리고 너무 큰 것을 보았다. 영혼이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면서 준엄하고 영원한 것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서워졌다. 대지의 창자를 타고 뜨거운 입김이 솟아나와 날개를 휩쓸어 버릴 것 같은 어떤 근원적 힘과 맞닥뜨린 것 같았다.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눈을 꼭 감고 마음을 꽉 움켜쥐는 것.

◆백암산 선구리 신선골

울진의 온정면과 영양의 수비면을 경계 짓는 백암산(白巖山). 해발 1천m가 넘는 웅장한 산이다. 영봉이 흰 바위 단애라 백암이라 하였고 온천과 금강소나무 숲으로 이름 높다. 산 서쪽의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장파천은 반변천이 되고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흐르고, 동쪽의 계류들은 모두 남대천으로 모여 평해 월송정 앞에서 동해가 된다. 산의 동북쪽을 흘러 역시 동해가 되는 내선미천(內仙味川)이 있다. 사방의 산수가 아름다워 신선이 놀던 자리라 하여 신선 선(仙), 또 이곳의 물맛이 특히 좋아 맛 미(味), 마을이 골 깊숙이 있다 하여 내(內)자를 따서 내선미다. 산천과 순정하게 여하였던 내선미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구리(仙邱里)가 되었다. 신선의 땅이다.


골 깊숙한 곳 자리한 신선의 땅 선구리
붉고 푸른 금강소나무·끝모를 긴계곡
산길따라 트레킹‘신선계곡생태탐방로’

계곡물이 합쳐져 장관 이루는 ‘합수곡’
기우제 ‘용소’등 폭포·소가 200여개
닭벼슬 바위·숫돌바위…재미난 이름
아홉 구슬 꿴 것 같은 구주령 고갯마루



선구리는 백암산에 온전히 파묻힌 채, 그것도 모자라 동쪽에는 서화산(西華山)을, 북쪽으로는 금장산(金藏山)을 높이 세운 먹먹한 산골이다. 내선미천을 거슬러 산으로 들면 붉고 푸른 금강소나무들이 창 든 군인마냥 당당히 서슬 푸르고, 기암의 좁고 긴 계곡은 끝 모르게 치닫는다. 오래 전 안개가 자욱했던 날 이 골짜기의 용소에 살던 이무기가 승천하다 어부의 창을 맞았는데, 용은 요동치며 백암산 팔선대에 폭포를 만들고 월송정의 용정에 우물을 만든 뒤 근처 바닷가에서 바위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또 어느 날에는 이진사(李進士)라는 사람이 이 골짜기를 보고는 신선이 놀 만한 곳이라 하여 신선골(神仙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선의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았다. 산 아래에는 경작할 땅이 부족했지만 산중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땅이 좋았단다.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어 콩과 팥을 키우고 숯을 구워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마을이 ‘독곡’이다. 마을은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철거됐지만 수년 전까지 몇몇 사람이 너와집을 지어놓고 약초를 캐곤 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의병장 신돌석이 치열한 전투 후 이곳으로 들어와 전열을 가다듬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오랫동안 신선골은 물웅덩이를 건너고 바위를 넘어야 하는 전문적인 계곡 트레킹으로만 접근이 가능했다. 몇 년 전 울진군은 걷기 어려운 바위절벽과 경사가 심한 산길을 따라 나무 데크를 설치하고 좁은 산길은 주변을 깎아 보다 쉽게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신선계곡생태탐방로’다.

◆신선계곡 매미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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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에서 본 매미소와 출렁다리. 이곳에서는 소가 그렇게 깜깜할지 예상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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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소 하류. 비교적 너른 물줄기가 선구리 마을로 향한다.

계곡 입구에 코스 안내판이 있다. 주차장에서 합수곡까지 6㎞가 신선계곡 트레킹 1코스다. 그리고 백암산 정상까지, 백암온천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안내 지도에는 용소와 합수곡만 표기되어 있지만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200여 개에 이른다. 용소는 기우제를 지냈다는 곳이다. 합수곡은 계곡물이 합쳐져 장관을 이룬다는 곳이다. 이 외에도 계곡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와 옛 광산 터가 있고, 닭 벼슬을 닮은 ‘닭 벼슬 바위’, 호박 같은 ‘호박소’, 낫이나 도끼를 갈았다는 ‘숫돌바위’, 신선이 목욕하고 놀았다던 ‘신선탕(다락소)’, 지세가 험준해 참새도 눈물 흘리며 오른다는 ‘참새눈물나기’, 다람쥐도 한달음에 뛰어오르지 못하고 숨을 돌려야 오를 수 있다는 ‘다람쥐한숨재기’ 등 재미난 이름들이 많다. 용소까지 갈까, 참새눈물나기까지만 오를까 가늠해 본다. 합수곡은 무리겠다.

조금 들어가면 왼쪽 길가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묘당이 나타난다. 대략 ‘처사경주이공의 가족 묘당’으로 읽힌다. 이곳을 신선골이라 명명했던 이진사일까. 아무런 안내가 없다. 곧 징검다리와 출렁다리 갈림길이 나온다.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다. 징검다리를 선택한 것은 계곡과 보다 가까이 빨리 만나고자 하는 급한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첫 소(沼)를 만난다. 시리도록 맑고 맑은 물. 주변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는 매미소다. ‘마음소(馬飮沼)’라고도 한다. 마음소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마음소 위에 옛날 ‘선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정자가 쇠락하자 마을의 한 주민이 정자 목재를 가져다 집을 짓는 데 썼는데, 그 집마저 20여 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출렁다리 가운데에서 내려다본다. 마음소로 흘러드는 짧은 물줄기의 양쪽 바위에 ‘선연동천(仙洞天)’‘한월주인(寒月主人)’이라 새겨져 있다. 선연동에서 경치 좋은 곳, 차가운 달의 주인. 정자 주인의 글일게다. 바위는 희고,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빛은 옥빛이다. 마음소의 물빛은 너무나 아찔하게 검푸르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얼마의 시간이 저 깊이를 만들었을까. 눈을 꼭 감는다. 눈 속에 소(沼)가 깊어진다.

◆구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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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령 근처에 위치한 옥녀당.

마음소에서 돌아 나온다. 계곡을 벗어나 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 앞에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울진과 영양을 잇는 구주령(九珠嶺) 길, 가파르고 가파른 길을 천천히 집중해 올라 구주령 표지석이 서 있는 고갯마루에 닿는다. 아홉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는 구주령. 둘러선 산들이 아홉 구슬인가. 시계가 좋은 날이면 동해 바다까지 보인다고 한다.

고개 근처에는 ‘옥녀당’이라는 한 칸 작은 사당이 있다. 옥녀의 전설은 영양과 울진 모두에서 전해진다. 울진군지에는 평해 원님이 임진왜란을 피해 가족들과 한양으로 상경하던 길에 갑자기 딸이 죽었는데, 딸의 몸이 타고 있던 가마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무덤을 만들고 ‘옥녀무덤’이라 했다고 전한다. 영양의 전설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조선 인조 때 영해부사로 일하던 황(黃)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옥녀라는 딸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명으로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구주령을 넘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하루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리기 위해 고개에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으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옥녀는 아홉 개의 아름다운 구슬 속에서 자신도 영원히 아름답기를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영원히 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꽉 움켜쥐고 몸을 묶는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안동방향으로 가다 안동분기점에서 30번 당진영덕고속도로 영덕방향으로 간다. 동청송, 영양IC로 나가 영양을 가로질러 수비면에서 구주령을 넘으면 바로 울진 선구리다. 중앙고속도로 영덕IC로 나가 7번 국도를 타거나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IC로 나가 7번 국도를 타는 방법도 있다. 울진 평해까지 북향한 후 88번 국도 영양방향으로 가면 백암온천지구 지나 선구리 신선계곡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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