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상주 .1] 백화산 호국의 길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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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7   |  발행일 2019-05-27 제12면   |  수정 2019-05-27
태종무열왕 삼국통일 전초기지…몽골침입 때 고려가 대승거둔‘천년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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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은 구수천 물길 따라 펼쳐진 옛길을 복원해 조성한 길이다. 5.1㎞ 구간마다 호국의 역사와 비경이 펼쳐진다. 호국의 길이 조성된 백화산은 신라 태종무열왕 때는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고, 고려시대 몽골침입 당시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의 주 활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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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길을 걷다보면 출렁다리를 마주한다. 출렁다리 아래로 물결치는 구수천과 천을 따라 펼쳐진 풍경이 일품이다.

상주는 명실상부한 호국의 성지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 나아가 나라를 구한 구심점이 상주 출신 인물들이었고, 고대부터 6·25전쟁까지 큰 전란이 있을 때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 또한 상주였다. 무엇보다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호국의 신념을 올곧게 이어 온 곳도 상주다. 특히 상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승리의 전투’였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으며, ‘지역민 스스로 일어나 목숨을 바친 전투’였다. 상주가 ‘호국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호국의 DNA와 호국의 역사가 뿌리 깊게 내린 ‘역사적인 현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격주로 ‘호국의 성지 상주’ 시리즈를 연재한다. 상주를 무대로 펼쳐진 역사적 현장을 소개하고, 나라를 위해 온 몸을 바친 상주 출신 인물들을 조명한다. 시리즈 첫회는 ‘백화산 호국의 길’을 다룬다. 호국의 길이 조성된 백화산은 신라 태종무열왕 때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고, 고려시대 몽골침입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의 주 활동지이기도 했다. 현재 백화산 호국의 길은 구수천 물길 따라 5.1㎞ 이어진다. 코스마다 호국의 역사와 비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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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입구에 세워진 ‘항몽대첩비’. 몽골제국의 6차 침입 당시 황령사 승려 홍지의 지휘 아래 상주 백성과 승병들이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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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천 5탄에서는 고려 악공 임천석의 충절이 전해오는 임천석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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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천(龜水川) 물길 위로 전함처럼 솟은 백화산(白華山). 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산협들의 힘줄이 든든히 불끈하다. 산은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을 경계 지으며 한강 이남의 정중앙을 힘차게 내달린다. 이를 보며 옛 사람들은 오랫동안 백화산맥이라 불렀다. 근육으로 에워싸인 어깨뼈에는 삼국시대 통일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금돌산성이 있다. 성 아래 깊은 협곡에는 고려 항몽기 몽골군의 피와 절규가 서린 저승골이 있다. 산자락이 절벽으로 떨어져 내린 구수천 물길에는 조선 초 혁명을 탄하며 목숨을 버린 고려 악사의 혼이 흐른다. 백화산 험한 골들은 임진왜란에 맞서 일어선 상주지역 수많은 의병들의 은신처였다. 1천년의 시간을 거치며 호국의 현장으로 숭앙되던 백화산은 일제강점기, 그 이름이 지도상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2007년, 백화산은 마침내 이름을 되찾았고, 2012년 구수천 여덟 여울을 더듬어 옛 길을 고이 열었다. ‘백화산 호국의 길’이다.

#1. 백화산 호국의 길과 금돌산성

백화산 호국의 길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壽峯里) 옥동서원(玉洞書院)에서 시작되어 영동과 경계가 되는 반야사 옛터까지 물길 따라 5.1㎞ 이어진다. 황희 정승을 배향하는 유서 깊은 옥동서원의 뒤편으로 10분 남짓 오른다. 오르막의 정점에 100여 년 전 시인묵객들이 걸음했다는 백옥정 정자가 있다. 아래로 징검다리 놓인 구수천 물길과 수봉리의 들판이 아스라하다.

구수천 징검다리 건너에 백화산 등산로의 기점이 되는 작은 절집 보현사가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신라시대의 석성인 금돌산성(今突山城)이 나타나고 이어 백화산 최고봉인 한성봉(漢城峰)에 이른다. 금돌산성은 백화산성, 상주산성, 보문성, 금돌성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자리잡은 백화산은 백제와 끊임없이 대치하던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한 상주행군대총관을 수년간 역임했던 김유신은 상주의 지리에 밝았다. 이를 헤아려 학계에서는 치밀한 장기적 계획 하에 주 공격로를 개설하고 금돌산성을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성곽 내부에 있는 대궐 터는 서기 660년,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마지막 일전을 위해 황산벌로 떠나는 김유신을 배웅하던 지휘소였다고 한다. 이후 무열왕은 금돌산성에서 백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옥동서원∼반야사옛터 물길따라 5.1㎞
백화산, 백제와 대치하던 신라군 요충지
구수천 4탄 출렁다리 건너면 ‘저승골’
승려 홍지 군사에 몽골군 떼죽음 당한곳
구수천 5탄엔 충절 상징 임천석대가 자리
임란 때 백화산은 의병 은신처 역할도


또한 금돌산성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의 6차 침입 때인 1254년 10월, 황령사 승려인 홍지(洪之)의 지휘 아래 상주의 백성과 승병들이 칭기즈칸의 후예인 자랄타이(車羅大)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정상인 한성봉의 이름은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자랄타이가 물러가며 ‘한을 남긴 성과 봉우리’라는 한성봉(恨城峰)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일제가 백화산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을 때 한성봉은 포성봉(捕城峰)으로 바뀌었다. 백화산의 기를 사로잡는다는 의미였다. 봉우리의 이름은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2008년 되찾았고 최근에는 보현사 입구에 ‘항몽대첩비’가 세워졌다.

호국의 길은 백옥정에서 직진해야 하지만 잠시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도 의미 있다. 백옥정 고개를 넘으면 길은 내내 순하다. 흙내 나는 흙길과 자글대는 돌길, 솔 향 퍼지는 송림 길, 진 길에는 친절한 톱밥 길이 열리고, 바위가 막아선 곳에는 데크 길이 놓여있다. 나무들은 사이좋게 뒤엉킨 가지들을 펼쳐 너른 그늘을 만들고 바람은 너그러운 소리를 내며 풀숲을 스쳐 지나간다.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석(洗心石)을 지나면 그제야 구수천이 옆구리로 바싹 다가온다.

#2. 구수천 8탄 따라 천년의 시간이…

구수천은 금강의 상류다. 영동 쪽에서는 석천이라고 하고 상주 쪽에서는 구수천, 중모천이라고 부른다. 들판을 가르며 느긋이 흘러오던 구수천은 수봉리에서 백화산 자락에 든 뒤로 굽이굽이 여울지며 비경을 풀어놓는데 그것을 구수천 8탄(八灘)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사람의 길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었던 시간이 1천여 년, 그래서 지금도 천년 옛길이라 불린다. 신라시대에는 구수천 8탄을 따라 하천 양안으로 석축을 쌓고 길을 개설해 기마병들의 훈련장으로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금돌산성에서 백제 사비성을 공격한 은밀한 공격로로 추측된다.

구수천 8탄 곳곳에 방성재, 저승골, 전투갱변 등의 오래된 이름이 남아 있다. 구수천 2탄에서 만나는 방성재는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 하여 구전된 지명이다. 구수천 4탄에 접어들어 출렁다리를 건너면 잠시 후 산으로 파고드는 골짜기 앞에 서있는 ‘저승골’ 표지석과 마주한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검은 바위에 섬뜩한 붉은 색으로 쓰인 ‘저승골’. 이 골짜기에서 홍지의 군사에게 유인된 몽골군은 떼죽음을 당했다. 저승골은 금돌산성의 남쪽 계곡으로 워낙 골이 험하고 암벽의 경사가 심해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저승골 남쪽 천변에는 난가벽(欄柯壁)이 솟구쳐 있다. 구수천의 물결이 심한 격단(몹시 빠르게 흐르는 여울)을 이루고 물소리가 요란한 곳이다. 저승골에서 살아남은 몽골군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거친 물살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곧 구수천 5탄인 ‘전투갱변’으로 이어진다. 그곳에 매복해 있던 승병들이 몽골군에게 다시 한 번 일격을 가했다. 고려사는 ‘패퇴한 몽골군이 남하하며 20만6천800여 명을 사로잡았고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거쳐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골 군사의 난이 있은 후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절한 패배에 대한 처절한 복수였다.

구수천 5탄에는 고려 악공 임천석(林千石)의 충절이 전해오는 ‘임천석대’도 볼 수 있다. 고려 말 거문고를 안고 상주 백화산에 들어온 임천석은 매일 높은 대(臺)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했다. 결국 고려가 망하자 그는 거문고를 버리고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한편으로는 조선 태종이 그의 재능을 알고 부르자 거절하고, 다시 부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했다고도 한다. ‘그가 떨어져 죽으니 수풀 사이로 새들이 슬피 울고 산하가 참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부터 구수천 물길은 여러 번 몸을 뒤튼다. 돌다리를 건너고 다시 한 번 돌다리를 건넌다. 그러면 곧 반야사 옛터다(현재 반야사는 하류로 약 1.3㎞ 떨어진 영동 땅에 있다). 옆에는 경북도 상주와 충북 영동군의 경계표지석이 있다. 이곳이 공식적으로 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이 끝나는 지점이다. 쉼터로 마련되어 있는 너른 평상에 앉아 백화산에 기댄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웅장한 백화산과 형제가 그려져 있다. 형제는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월간(月澗) 이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봄, 형제가 머물던 의병 본부에 왜적이 쳐들어 왔다고 한다. 당시 이준은 몸이 불편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준은 형 이전에게 혼자만이라도 피신할 것을 간청했지만 형은 동생을 업고 달렸다. 그렇게 몸을 피한 곳이 백화산이다. 그림은 형이 아우를 설득해 업고 떠나는 장면, 아우를 내려놓고 왜군을 향해 화살을 겨누는 장면, 적을 물리친 후 다시 아우를 업고 산 정상을 향해 달리는 장면, 백화산 정상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 등 총 4장으로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나라의 화공이 그렸다. 이국의 사람들까지 감동시킨 형제의 우애는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반야사 옛터의 서쪽 봉우리는 백화산 주행봉(舟行峰)이다. 이름 그대로 큰 군함이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다. 산은 그 기세를 잃은 적 없고 사람들은 그 시간을 잊은 적 없다. 백화산 호국의 길은 조성단계에서부터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 등 지역주민들이 적극 참여했고 지금도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우리마을 녹색길 지킴이단’을 구성해 관리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한국지명유래집. 한기문, 상주의 역사와 백화산, 2001.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연구, 일지사, 1991. 정영호,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 1972. 고려사,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 번역본(역주고려사)

공동기획지원 : 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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