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문재인 대통령의 부채의식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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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2   |  발행일 2019-05-22 제31면   |  수정 2019-05-22
20190522

내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서다.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영남일보가 단독 인터뷰했다. 대구 범어네거리 호텔이었는데 참모들은 호텔 방의 커튼을 모조리 내렸다. 파란만장 독재에 저항해오면서 쌓인 ‘피해의식’이 엿보였다. 일흔을 훌쩍 넘긴 그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영·호남의 화합을 언급했고, 2·28의 대구를 존중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우리집 거실에 아직 있다.

이보다 훨씬 오래전 멀리서나마 정치인 김대중의 얼굴과 육성을 처음 확인한 때는 1980년이었다. 서울의 봄이다. 그의 연설이 있던 대학 강당은 미어터졌다. 그는 포효했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이듬해 80년 5월, 서울 대학가는 정말 어수선했다. 학생 데모대는 마침내 거리로 나섰다.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그가 누구냐’는 반문이 들렸다. 교정에 등장한 탱크는 휴교령을 의미했다. 몇달 뒤 친구가 가져온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소문으로 듣던 ‘그 사태’를 충격으로 전한다. ‘김대중 석방하라’는 외침이 5·18 광주의 주검으로 되갚아진 사진들이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민주화의 부채의식’도 그때 싹텄으리라. 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당선이 역사의 순리라고 내심 생각했던 것도 그런 부채의식의 연장이었다.

지난 5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제39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다. 대통령의 연설 전문을 읽고 또 읽었다. 대통령은 “80년 5월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말 미안합니다. 광주의 5월은 우리에게 깊은 부채 의식을 남겼습니다. … 그 부채 의식과 아픔이 민주화 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광주에 대한 헌사다.

대통령의 연설이 여기서 그쳤다면 흠잡을 데가 없다고 나는 느꼈을 것이다. 부채 의식은 시공간을 확장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고 있다”고 하면서도 “5·18 이전, 유신시대와 5공시대에 머무는 지체된 정치 의식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새로운 시대를 갈 수 없다”고 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아마 대통령은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권 일각에서 나온 5·18에 대한 이런저런 이의 제기를 겨냥한 듯했다. 지난해 3월 국회를 통해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에 따른 위원회 출범 지연이다. 야당에서 2명의 위원을 추천했지만 청와대가 자격미달이란 이유로 거부해 표류 중이다. 여기다 3명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이른바 5·18을 폄훼하고 뭉갰다며 여당이 야당 내부의 징계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지만, 일방의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5·18의 처절함을 복원하는 정의의 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한편에서는 유공자 공개를 해보자는 반발이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다. 100% 동의에서 출발한다면 애초부터 정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게 실현가능하다면 전체주의를 꿈꾸는 이들일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서 의심할 바 없는 5·18에 ‘우상의 성역’이 어른거린다는 것은 논리 모순이다.

우리는 5·18에서 6·10, 촛불에 이르기까지 세계 그 어떤 나라도 도전해보지 못한 민주주의 정치 여정을 시현하고 있다. 강산도 4번쯤 변했다. 대통령의 언급처럼 40년 전의 지체된 정치의식이 지배하는 시대라면 스스로 촛불혁명이라 부른 문 정권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게다. 문 대통령이 존중하는 김대중-노무현도 이미 앞서 갔다.

권력은 지금 문 대통령에게 있다. 40년 전의 부채 의식이 정권의 수단으로 치환된다면 곤란하다. 좋은 보약도 자꾸 우려먹으면 찌꺼기가 된다. 문 대통령의 권력만이 부채 의식으로 포장돼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도 없다. 문 대통령은 이제 복제되는 부채 의식을 떨치고 다른 곳을 바라봐야 한다. 민생과 경제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당장 2019년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은 수치로만 보기에는 심상치 않다. 대한민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몇 순간을 빼고 과거 이런 일은 없었다. 작금의 역성장은 국민에 대한 치명적 부채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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