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죽음과 추모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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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21   |  발행일 2019-05-21 제30면   |  수정 2019-05-21
심청을 효녀로만 기억말고
죽음 둘러싼 상황도 알아야
오늘날 수많은 죽음 재평가
그 죽음들을 망각하지 말고
그런 죽음 다시 없도록 해야
[3040칼럼] 죽음과 추모의 문제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보통 ‘심청전’이라고 하면, 공양미 300석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인당수에 뛰어든 효녀(孝女)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공양미는 심봉사가 눈을 뜨기 위해 몽은사 화주승에게 약속한 대가였으며, 이 때문에 심청의 투신 행위는 부친을 위한 효행(孝行)으로 간주되었다. 희생과 효의 관계는 ‘심청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용궁에서 부활한 심청은 황후가 되어 부친의 눈까지 뜨게 만듦으로써 효행의 서사를 완성시킨다.

그런데 ‘심청전’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바로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든 이후 심봉사를 포함한 도화동 사람들이 심청의 희생을 기리며 충효비(忠孝碑), 타루비(墮淚碑), 불망비(不忘碑)와 같은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이다. 기념비는 심청의 죽음을 기억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심청을 효녀로 칭송하는 송덕의 기념비는 도화동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을 상징하는, 다시 말해 기억공동체에 대한 기념비로서 기능한다. 기념비에 붙은 타루(墮淚)나 불망(不忘)과 같은 수식어는 도화동 사람들이 심청의 죽음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념비가 때로는 심청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제를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가부장적 질서의 폭력이든, ‘효녀 만들기’라는 미명 하에 심청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이든, 기념비는 심청의 효행을 칭송함으로써 그런 폭력을 슬쩍 감추고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죄책감마저 지워버릴 수 있다.

‘심청전’에서도 그런 양상이 발견된다. 뺑덕어미가 등장한 이후 심봉사는 심청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좇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심봉사에게 있어 뺑덕어미는 삶의 마지막 탈출구였을 수도 있고, ‘딸 팔아먹은 아비’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을 수도 있다. 그런 심봉사가 다시 심청을 떠올린 것은 맹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황성으로 올라가던 도중 뺑덕어미가 황봉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직후였다. 뺑덕어미가 사라지자 혼자가 된 심봉사는 다시 심청을 떠올린다.

그런데 ‘심청전’에서는 그때부터 심봉사를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황성 길을 나아가는 인물로 묘사한다. 목욕을 하다가 옷을 다 잃어버려도 당당하게 무릉태수에게 옷가지뿐 아니라 곰방대까지 얻어낸다. 물론 심청을 잊은 것은 아니다. 황후가 된 심청 앞에서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죄인이라고 자책하는 장면은 심봉사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심청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황후의 정체가 심청으로 밝혀졌을 때 심봉사는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나 눈을 뜬다.

심봉사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죽음과 추모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을 추모라고 했을 때, 기념비는 그런 추모가 물질적인 형태로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청전’은 기념비를 세우는 행위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심청의 죽음을 기억해야 함을 강조한다. 무엇이 심청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런 죽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등 심청을 효녀로 기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심청의 죽음 자체를 둘러싼 문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심청전’이 보여주는 추모의 방식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에는 그동안 사회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죽음이 재평가되고 있다. 그런 움직임과 함께 추모의 물결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망각에 대한 요구다. 추모에 내재된 죽음에 대한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심청의 죽음을 망각해버린 심봉사의 삶은 공허했으며 다시 심청을 떠올렸을 때 그는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심청전’처럼 망자(亡者)가 부활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비록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를지라도, 죽음에 대해 기억은 지속되어야 한다.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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