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10] 의열단과 사회주의 계열 항일전쟁에 참전한 대구경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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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관기자
  •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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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주역 이종암, 암살·폭파사건 23차례 관여…日 육군대장 저격도 시도

중국 상하이 황푸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상하이시 야경. 1922년 황푸강 부두에서 대구출신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의사가 다나카 일본 육군대장 저격을 시도했다.
영화 ‘암살’과 ‘밀정’으로 의열단이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지난 4일부터는 MBC가 가세했다. 매주 토요일 방영하는 드라마 ‘이몽’은 의열단과 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소개하고 있다. 김원봉은 남과 북에서도 버림받은 비운의 항일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보다 일제의 현상금이 높았다. 의열단은 외교나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운동보다 암살, 파괴 등 일제를 직접 타격하는 데 목적을 둔 무장단체였다. 한말의병과 광복회의 무장투쟁정신을 이어받고 나아가 신흥무관학교와 군정서, 조선의용군, 광복군, 조선혁명군,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같은 조직적인 독립군의 뿌리가 된다.
저항시인 이육사와 의열단원인 영천출신 이원대 의사가 순국한 옛 베이징감옥. 감옥은 일본 영사관 헌병대 건물 지하에 있었다. 현재 재개발로 철거 위기다.
중국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전시된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의 유품(권총, 말안장, 안경).

저격 실패했지만 윤봉길 의거 성공 밑거름
은행서 돈 빼내 의열단 창단자금에 쓰고
김시현·서상락 등 경상도파와 항일 투쟁

만주선 사회주의계열에 참여한 청년 늘어
중국 공산당원 2000여명 중 한인이 85%
동북항일연군 가담…일본군과 맞서 싸워
지역출신 허형식·강신태·류만희 큰 전과


◆의열단 출신 대구경북 독립운동가

“중국땅에서의 불령운동에 관해서는 ‘경상도파’라 하여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으며 여러 차례 암살과 파괴의 흉포 행위를 자행한 의열단원 중에도 본도(경북도 지칭) 출신 간부가 수 명 있다. 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중에도 다수의 본도 출신 관계자가 있어서(중략) 수뇌자 중에 본도 출신자가 개입하지 않은 일이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사회 이목을 놀라게 한 중요 범죄 사건에는 본도의 관계자가 없는 일이 거의 없다.”

1934년 일제고등경찰요사 기록에서 보듯 의열단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중엔 유달리 대구경북 출신이 많았다. 의(義)를 중요시하는 학문적 풍토에 실천을 앞세우는 경상도사람의 기질이 부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10일 중국 지린성 파호문 밖 이종암의 집에서 김원봉·윤세주·한봉근·김상윤(밀양)과 이종암·서상락(대구), 신철휴(고령), 곽재기(충북), 강세우(함남), 이성우(서울) 등 10명이 모여 반민족 부일배와 수탈기관을 처단한다는 ‘7가살 5파괴’를 모토로 창립한 단체다. 고문은 약산의 고모부인 황상규와 김대지였고, 조선혁명선언을 쓴 신채호, 아나키스트 이회영, 조선의 마지막 선비 김창숙(성주) 등 베이징 3걸은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창립멤버는 한봉인·윤소룡·배중세를 넣어 13명설, 권준(상주)·이수택(칠곡) 등을 포함한 17명설이 있다. ‘1은 9를 위하여 9는 1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의열단 공약 제9조가 실제 인원 10명이라는 대구대 김영범 교수의 2017년 논문을 근거로 지금은 10명설이 유력하다.

지역출신으로는 이덕생·이상도·이영록·현정건·현계옥·서동일·이현준·이경희·이기양·이상정·이상쾌(대구)와 이육사·김정현·김시현·김지섭·권정필(안동)·김재수(상주)·최재화(선산)·윤자영(청송)·이원대·이진영(영천)·김상덕(고령)·한지성(성주) 등이 참여했거나 의열단을 거쳤다.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단원은 1923년 11월30일 70여 명, 이듬해 1월 200여 명이었다. 1923년 일제 조선군사령부는 150명으로 파악했다.

이들 가운데 서상락은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출신으로 밀양경찰서 폭파를 계획하고 중국과 독일에서 독립군기지를 확보하려다 30세에 사망했다. 동암 서상일(독립운동가·제헌의원)의 형 서상락과 동명이인으로 한자 또한 같다. 동암의 형은 칠곡 동명면장 등을 한 일제 관리였다.

이종암(1896~1930)은 약산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인물(부단장)이다. 대구가 낳은 대표적 항일투사이지만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는 동구 백안동에서 태어나 6세 때 달성공원 인근 서성로에 살았다. 조부는 조선의 오위장 출신이다.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를 졸업한 뒤 대구농림학교를 한 학기 다니다 가난으로 중퇴하고 부산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그만뒀다.

1913년 친일부호였던 고모부 정재학 등이 대구은행을 설립해 초대 두취(현 행장)에 오른 덕에 이듬해 대구은행에 입사, 출납계 주임이 됐다. 1916~1917년 광복회가 주도한 ‘대구권총사건’과 반민족부호‘장승원 사살사건’에 연루된 입행동기 신상태에게 감화를 받은 그는 1918년 은행돈 1만900여원을 빼내 만주로 가 ‘양건호’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의열단 동지들을 만나 창단 주역이 된다. 그의 돈이 의열단 창단 종잣돈이 된 건 명약관화하다. 그는 25년 체포될 때까지 6차례나 국내로 잠입해 의열단이 감행한 23차례의 암살·폭파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그 가운데 22년 중국 상하이 황푸탄 의거(경신학살의 주범 일본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사건)와 경북의열단사건(군자금 조달)은 대표적이다. 특히 황푸탄 의거는 실패했지만 10년 뒤 임정이 펼친 윤봉길 의거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26년 13년형을 선고받고 4년6개월간 복역하다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했으나 대구 남산동에서 35세로 순국했다. 사후 일제는 그의 무덤마저 없애버렸다. 그의 아내는 보따리장사를 하며 연명했고, 아들은 정신질환으로 사망했다.

김시현은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김우진역)가 맡은 역할의 롤모델이다. 일명‘황옥사건’의 주인공이다. 베이징, 나가사키, 대구형무소 등지에서 총 15년간 옥살이를 한 그는 광복 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에 맞서 민주국민당으로 출마, 2대 국회의원이 된다. 6·25전쟁 중 52년 6월25일 부산에서 유시태와 함께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 4·19로 풀려나 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계에서 물러났다. 서훈없는 독립운동가이지만 부인 권애라, 동생 김정현은 서훈을 받았다. 김지섭은 일왕이 사는 궁성의 ‘이중교 투탄사건’의 주역이다. 또 제2경북중대사건(가이순사 사살사건)에 참여한 송두환과 최윤동이 있다. 이 밖에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으로 요인암살을 모의한 조기홍(대구)·허병률(경산) 등도 의열투쟁을 했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이기에 앞서 ‘독립전사’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린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과 관련해 수감번호 264를 얻었으며 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17차례나 투옥됐다. 그는 32년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출신으로 학생들은 모두 의열단원이었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한 대구경북사람

최근 독립운동을 좌·우이념이 아닌 독립운동 그 자체에 집중해 봐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서훈도 북한 정권수립에 직접 참여했거나 6·25전쟁 때 북한군 일원으로 종군한 것이 아니라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1930년대 만주에선 사회주의 계열에 참여한 청년들이 늘어났다. 30년 3월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만주의 조선공산당원들은 모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됐다. 당시 2천여 명의 중국공산당원 중 한인은 85%정도였다. 석주 이상룡의 후예들인 이준형·이광민·이광국·이병화를 비롯해 권정필(이동산)·이성철·류만희·김영로(한호)·김노숙 등의 안동 출신 청년들, 허형식(구미), 강신태(강건·상주)·배성춘·배석철·배석구·배경천 형제자매(청도), 배치운(의성)·이근숙(예천) 등은 유격대를 거쳐 조선혁명군, 동북인민혁명군에서 통합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한다. 동북항일연군은 한때 1로군~11로군까지 2만명을 넘기기도 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에 병력을 계속해 증파, 41년엔 70만명까지 늘렸다. 결국 동북항일연군은 무너지고, 일부는 동북항일연군교도려(소련 극동군 88여단)로 편입됐다. 중국·소련·조선인들로 구성된 교도려 1천300여 명 중 조선인은 100여 명이었다. 이들은 북한정권 수립의 핵심세력이 된다.

동북항일연군 중 두각을 나타낸 지역의 인물은 허형식과 류만희, 김영로, 배성춘, 강신태 등이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교도려가 편성되기 이틀 전(1942년 8월1일) 헤이룽장성 경안현에서 33세의 일기로 전사했다. 교도려 지휘관인 저바오중 아래 4개의 영장(대대급)이 있었는데, 허형식은 3영장(1영장 김일성, 2영장 왕샤오밍, 4영장 차이스룽)이었다. 또 2영장 정치위원은 강신태였다.

허형식은 왕산 허위의 종질이다.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나 6세 때 부친 허필을 따라 만주로 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전사 후 일제는 그의 목과 몸을 분리해 효수했다. 3년 전 동향인 박도 작가가 ‘만주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이란 소설을 출간했다.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류만희는 풍천면 하회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간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3사 정치부주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1군 참모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하지만 40년 3월24일 압록강 중류 린강 곰골 밀영에서 변절한 대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가 항일운동에 투신하자 일제는 그의 어머니와 두 동생을 생매장했다.

안동 천전리 출신인 김영로는 한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34년 일본군 가나이다 사령관을 처단했고, 36년 환인현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강신태는 1918년 상주에서 태어나 만주로 가 15세 때 항일유격대에 들어갔다. 동북항일연군 총대장 저우바오중(주보중)의 부하로 활동했고 그때 김일성을 만나 최측근이 됐다. 전과를 올려 동북항일연군교도려 2영장 정치위원에 임명되고 광복 후 이름을 ‘강건’으로 개명, 동북인민자치군 연변지역 사령관을 하면서 1만여 명의 토비를 소탕했다. 6·25 때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참전했으나 50년 9월8일 안동에서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 장례식 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했다고 알려진다. 남한의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급의 평양제1군관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강건종합군관학교가 됐다. 황해북도 사리원에는 강건대학과 부설 강건대학병원이 있으며 ‘강건거리’라는 지명도 생겼다고 한다.

배성춘(손명숙)은 1902년 청도 운문리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9세 때 동생과 함께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가 30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최용건이 만주에 설립한 송동모범소학교에 다니며 항일전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리민(천레이 전 헤이룽장성 성장의 부인으로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인)과 인연을 맺었다. 리민은 그를 언니로 따랐다. 30년대 헤이룽장성 탕원중심현위 위원을 역임했으며 탕원유격대 창설자 중 한 명이다. 동북항일연군 제6군 재봉대 대장을 역임하며 항일연군의 피복을 책임졌다. 38년 일본군의 기습 때 전사했다. 그의 동생(석철·석구·경천)도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참전해 전사했다. 막내동생 배경천은 6군 4사 2퇀 정치부주임을 했다. 이 밖에 알려지지 않은 지역 출신 동북항일연군 전사가 있다.

글·사진=중국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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