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아!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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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3   |  발행일 2019-05-13 제30면   |  수정 2019-05-13
손꼽은 수학여행 이틀전에
계부에 살해된 여중생 사건
12년의 짧은 인생 너무 가련
한국 ‘30-50클럽’ 가입불구
사회 구석구석에 불행 방치
[아침을 열며] 아! 무정

얼마 전 12세 여중생 소녀가 의붓아버지에게 살해 당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녀는 부모가 이혼한 뒤 친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친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폭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은 재혼한 어머니 집에 가서 살기도 했는데, 그 집에서도 폭언과 폭력은 피할 수 없었다. 추운 겨울밤에 의붓아버지에게 두들겨맞고 집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으니 그 소녀의 고초는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의붓아버지의 성추행이 계속되었고, 강간미수까지 벌어지니 소녀가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경찰의 치밀하지 못한 대응 때문에 신고 사실이 의붓아버지에게 알려졌고, 자신의 범죄가 들킬 것을 두려워 한 의붓아버지가 소녀의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를 불러낸 뒤 차에 태우고 다니다가 목졸라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여중생은 수학여행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수학여행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12년 짧은 인생이 너무 가련하여 눈물 없이는 이 사건을 읽을 수가 없다. 부디 그 넋이라도 훨훨 저 세상으로 날아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 뿐이다. 의붓아버지가 차 뒷좌석에서 소녀를 목졸라 살해하는 동안 소녀의 어머니는 앞좌석에서 돌을 갓 지난 어린 아들을 안고 있었다고 하니 자기들 자식이 보는 앞에서 살인을 하는 이런 인간도 있는가. 자기 딸이 죽어가는데 발악을 해서라도 몸을 던져 막을 생각도 않고 방치하는 이런 어머니도 있는가. 모성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고, 모성애만큼 거룩한 것은 이 세상에 없는데, 이런 어머니도 세상에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재미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배에 실고 강을 따라 항해를 계속했는데, 새끼를 잃은 그 어미가 울며불며 몸부림치며 배를 따라 강 연안을 계속 쫓아왔다고 한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결국 그 어미 원숭이가 탈진해서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보니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충분히 실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나 자신이 동물의 모성애를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한 20년쯤 전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의 오래된 나무 몇 그루를 인부들이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나무의 꼭대기에 새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나무가 전기톱에 베어져서 쓰러지니 그 둥지도 땅 위로 스르르 떨어졌는데, 그 속에 꼬물꼬물하는 새끼가 몇 마리 보였다. 어미새가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깍깍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나무와 인부들 주위를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너무나 측은하여 나는 인부들에게 간청하여 작업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 둥지를 옆의 다른 나무 위에 올려주었는데, 그 어미새와 새끼들이 그 뒤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이 세상은 넓지만 위의 여중생이 기댈 언덕은 없었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30-50 클럽’에 가입한 것을 자축했다. 30-50이란 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넘고, 인구가 5천만명을 넘는 나라라는 뜻인데, 세계에서 7개 나라밖에 없다. 물론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 구석구석에 방치된 불행이 너무 많다. 며칠 전 어린이날 아침에도 차 안에서 어린이 두 명을 포함한 4인 가족의 시신이 발견됐는데, 자살 이유는 빚 7천만원으로 추측된다. 어디 아이들 뿐이랴. 노인 빈곤은 또 어떤가. 한국은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일하는 노인의 비율이 모두 세계 1위다. 단적인 증거로 길거리에 폐휴지를 줍는 노인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버는 쥐꼬리 같은 수입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30-50 국가에 어두운 구석이 너무 많고 인간 불행이 너무 많다. 못다 핀 가여운 어린 꽃들을 애도하면서 우리가 일대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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