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공수처의 달콤한 유혹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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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08   |  발행일 2019-05-08 제31면   |  수정 2019-05-08
[박재일 칼럼] 공수처의 달콤한 유혹
논설위원

공수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다. 멋진 이름이다. 고위공직자 그러니까 높은 관직에 오른 자들의 비리를 모조리 감시해 처벌하겠다는 기구다. 누가 반대하겠는가. 먹고살기 힘든, 아니 상대적으로 힘 없는 다수 대중은 안 그래도 소수 공직자들에게 노상 당한다고 생각하는 시대 아닌가.

공수처법을 검찰·경찰의 수사권 조정, 선거법 개정과 함께 이른바 국회 ‘패스트트랙’에 태웠다. 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바른미래당이 연대해 밀어붙였다. 자유한국당이 열받아 장외투쟁을 하고 있다. 수사권 조정이나 선거법은 경찰관, 검사와 검찰청 직원, 여야 국회의원과 정치인이란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있어 지들끼리 치고받을 사안이 될 공산이 크니 논외로 하자. 내가 보기에는 공수처가 문제다.

우리는 종종 계약을 하면서 믿고 도장을 찍는 경우가 많다. 빼곡한 부동산 계약서에, 노안이 왔다면 전혀 보이지 않는 보험회사 약관에 서명을 한다. 일이 틀어져 뒤늦게 항의하면 들이민 약관과 계약서에 낭패를 본다. 열받아 변호사라도 찾고 싶지만 바쁜 생활고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공수처법에는 무슨 트랩(trap) 같은 의도, 섬세한 곳에 악마가 있다는 그런 경고가 겹쳐진다. 마치 복잡한 계약서처럼.

대한민국은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 원칙에서 유독 대통령 권력이 비대해졌다는 지적이 많다. 대법원장마저 대통령이 지명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국회의장도 같은 범주다. 대통령 선거가 사생결단이 되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경수사권을 조정, 검찰권력을 줄이고 공직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별도의 공수처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 휘하인 청와대 주변에다 행정부의 고위공직자 부패를 감시하고 겸허하게 운영하겠다고 하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안을 보면 공수처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수사권이 분리되든 말든 검찰과 경찰은 여전히 대통령 수하에 있는 것이고, 여기다 공수처가 하나 더 얹혀진 셈이다. 더구나 공수처는 검사와 경찰을 자체 감시하고, 나아가 판사까지 과녁에 넣을 수 있다.

권력은 잡고 나면 더 장악하고 싶어진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스스로 힘을 빼겠다고 나선 적은 없다. 문 대통령은 지금 자신을 둘러싼 청와대 내부의 감찰 기능을 가진 특별감찰관조차 취임 2년이 되도록 임명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청와대의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박 대통령 탄핵의 뇌관이 됐다는 점을 의식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보다 공수처 관리대상에 3천200여명의 판사가 포함된다는 점이 찜찜하다. 그게 삼권분립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조차 애매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에서 보듯 판사 혹은 법원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이 존경 일색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판사들이 판결에 위축받고 있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판사 출신 변호사가 한탄했다. ‘성폭행범이 살인죄보다 형량이 더 높다. 댓글이나 외부 여론, 정치동향에 영향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문재인정부 들어 사법농단 사건으로 전직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수뇌부가 구속되고, 70여명의 판사가 징계에 올랐다. 이제는 대중이 사법부를 조롱하고, 아예 판결에 압력을 가하는 풍조마저 노골화됐다. 실세 경남도지사가 구속되자 해당 판사에 악담을 퍼부었던 사례를 한 번 상기해보라.

처단과 단죄에 대중은 열광하기 쉽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그런 환호만으론 자라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의 검사 출신 국회의원마저 ‘공수처는 특별권력기관이기에 정권의 칼로 악용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다’고 했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모두에게 자신들을 감시하는 특별기구가 생겼으니 조심하거나 줄서기를 하라는 신호일 수 있다. 삼권분립의 한축, 판사마저 예외가 아니란 위협이다.

어쩌면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이 자신들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다면 공수처를 패키지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공수처는 다음에 한국당이 집권하면 현재의 민주당 권력에 부메랑이 될 것이다. 공수처는 권력의 유혹에 다름 아니다. 권력을 한쪽으로 몰아가려는 이 정권의 행보에 불길함을 느낀다. 권력집중은 독재의 틀이 되기 쉽다. 그래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진화하기 어렵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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