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봄엔 신들이 여기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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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06 07:39  |  수정 2019-05-06 07:39  |  발행일 2019-05-06 제12면
[행복한 교육] 봄엔 신들이 여기에 산다

긴 겨울은 죽음을 닮았다. 삼월 초, 봄은 더디기만 했다. 메마른 나뭇가지는 찬바람에 윙윙 소리를 내며 밤을 견뎠다. 조금씩 햇살이 부드러워지자 자주 창문을 열었다. 어느 순간, 하얀 구름이 몽실몽실 펼쳐지더니 매화나무 바알간 꽃눈이 봉긋해지고 등불처럼 피어났다. 산수유 꽃은 기가 막힌 봄빛으로 오므려 쥔 손을 일제히 펼쳤다. 봄꽃의 결정판 벚꽃과 복숭아꽃은 기다린 이의 가슴에 만개했다. 그러나 이제 봄은 자리를 뜬다. 영랑의 시가 아니더라도 봄은 처연하다. 나이가 들수록 봄은 자연의 위대함을 가르치고 동시에 죽음의 현실도 일깨운다.

알베르 카뮈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고대 유적이 폐허가 된 알제리의 도시 티파사를 특별히 사랑했다. ‘티파사의 봄철에는 신들이 내려와서 산다’라고 할 정도였다.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어 고대 도시의 광장 포석 사이로 아낌없이 꽃들이 피어난다. 붉게 피어난 제라늄, 언덕의 로즈마리, 끝없이 핀 부겐빌레아, 풀벌레 등 야생의 향기와 열기에 도취하곤 했다. 그는 슈누아 언덕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기쁨 뒤에 찾아오는 평온한 고독 속에서 깊은 만족감을 가졌다. 심지어 카뮈는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했다.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로 하나의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를 했다’고 썼다.

초등학교 시절, 봄꽃은 기억에 없다. 다만 꽃가루 과민반응 유발을 이유로 베어내기 전이라, 당시 운동장에는 수양버들이 많았다. 실버들 연둣빛 수많은 줄기가 봄비에 그네처럼 출렁거렸다. 햇빛이 들이치면 빗방울에 미끄럼틀이 굴절되어 송송 달렸다. 여름의 교정은 단연 샐비어 꽃이다. 꽃을 따서 빨면 달작지근해서 몇몇 친구들과 아침마다 꽃밭을 누볐다. 중학생 때는 막 신축한 학교라 정원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삭막했지만 아쉬움도 없었다.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제비도 날아 왔지만 춘추복도 없던 시절이라 시커먼 동복에 싸여 계절감도 무뎠다. 중간고사까지 수많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알아가고 쏟아지는 숙제를 하느라 봄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근무하는 신서혁신도시에는 5개의 저수지가 있다. 논밭에 물을 대던 기능에서 쉼과 여유를 주는 호수공원으로 바뀌었다. 학교 정경을 졸업앨범에 넣기 위해 드론으로 촬영했더니 학교 바로 뒤 저수지가 캠퍼스의 호수처럼 보여 학교가 미술관 같았다. 훗날 우리 학생들이 지구촌을 누빌 때 교정의 추억을 떠올리도록 교장 모습과 집무 광경을 빼고 학교 정경을 두 페이지에 걸쳐 넣었다. 그리고 부지런한 봄을 맞아 잔디밭 중 운동장으로 내닫는 지름길이 되는 곳은 돌다리를 놓았고 키 낮은 꽃으로 꽃길을 만들었다. 주무관은 ‘3~4월 내가 자라도록 도와줘’ ‘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줘서 고마워’를 새겨 나무에 걸어 두었다. 교정의 일일초가 생기 있게 자라도록 분수 호스를 놓았다. 수도관을 열고 호스를 평평하게 놓으면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구치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방울방울 떨어진다. 수많은 물방울이 마른 땅의 새싹을 적시는 것을 지켜보는 건 거룩한 명상이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 언덕 동쪽에 위치한 여름궁전의 분수를 닮았다.

넝쿨 장미의 줄기를 학교 울타리와 엮어 주고, 무서운 속도로 학교 꽃밭을 뒤덮는 갈퀴나물을 뽑고 있다. 감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도시농부 사업을 신청하여 텃밭도 확충하고 갖가지 모종을 심었다. 이제 오월의 장미를 기다린다. 미세먼지 없어 깨끗하게 파란 봄 하늘을 우러른다. 나무와 꽃을 알아가며 그 변화를 경이롭게 보는 것은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는 법’을 배우는 살아있는 교육이다.

김희숙 (대구 새론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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