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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그 중심에 선 대구·경북인 .9] 중국으로 간 대구경북인의 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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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관기자
  • 201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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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광복군 전신 신흥학교…독립군 요인·지도자 대거 배출

민주평통대구지역회의 임원들이 지난해 12월 중국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일제가 1932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자 임시정부는 그해 5월 항저우로 거처를 옮겼다. 항저우에서 3년6개월간 머무른 임시정부는 다시 진장~창사~광저우~유저우~충칭으로 이동한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3·1운동 후 비폭력, 평화시위에 한계를 느낀 민족지도자들은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거나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정부를 곳곳에 세운다.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경술국치 후 산발적으로 진행돼 왔으나 3·1운동을 기점으로 본격적·구체적으로 이뤄진다. 러시아 연해주와 하와이, 심지어 일본 본토에서도 독립군기지를 세우거나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 만주지역과 관내인 상하이와 베이징이 중심이 됐다. 나라 밖 한국인은 광복 때까지 500만명에 이르렀다. 광복 후 절반이 환국했으나 나머지는 현지정착, 억류 등으로 남았다.

◆경술국치 후 만주로 간 대구경북의 혁신유림

구한말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던 대구경북의 민족지도자들은 경술국치 후 만주, 특히 서간도로 정치적 집단망명을 결행했다. 이들이 백두산 기점 북쪽 북간도로 가지 않은 것은 이미 함경도 이주민이 그곳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서간도는 현재 중국 동북3성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랴오닝성과 헤이룽장성의 중간지대인 지린성 유하·지린·창춘을 중심으로 하얼빈·상지·오상 등 헤이룽장성 일대, 심지어 내몽골자치구가 있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경상도 이주민 후손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서로군정서 참여…청산리대첩에 참전
국내외 관공서 습격·파괴활동도 펼쳐
안동출신 이상룡은 초대 국무령 역임
김동삼·남형우는 임시의정원 첫 멤버
임정 산하 광복군엔 80여명이 맹활약


서간도로 집단 망명을 이끈 인물은 주로 안동지역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안동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도곡마을 고성이씨 일가,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천전리(내앞마을) 의성김씨 일가, 퇴계 이황의 후손인 도산 하계마을 진성이씨 일가, 무실·박실·삼산마을의 전주류씨 동산 류인식 일가, 황호를 원로로 하는 평해 사동마을 평해황씨 일가, 안동권씨 집성촌인 남후면 추산 권기일 일가 등이다. 석주와 겹사돈을 맺은 선산의 왕산 허위 선생 일가도 1912년과 15년 집단망명해 이들과 합류한다. 이들은 대대손손 물려받은 전답과 고택을 처분하고 만주로 풍찬노숙의 길을 택했다. 당대 지식인과 부호들이 가문을 잇기 위해 자식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때 이들은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

1910년 12월24일(음력) 의성김씨 일가를 필두로 이들 거족은 줄줄이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린성 화전 횡로촌을 거쳐 통화현 삼원포에 도착, 1911년 4월 경학사(만주지역 최초의 독립운동단체, 이후 부민단으로 계승되며 초대 단장은 왕산 허위의 형인 허겸이 맡았다)와 그해 6월10일 신흥강습소(초대교장 김형식·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1912년 7월20일 신흥강습소는 삼원포 합니하로 옮겼다. 여준과 이상룡이 신흥중학, 신흥학교로 교명을 바꿔 운영했다. 교관과 학생 중엔 대구경북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신흥학교는 수많은 독립군 요인과 지도자를 배출했다. 지청천, 신팔균, 김광서는 일본육사를 졸업했지만 탈출해 이 학교 교관으로 활약했다. 신흥학교는 광복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생도는 3천500여명이었다.

◆서로군정서와 만주에서 활동한 대구경북인

1942년 10월25일 임시의정원 34회 회의를 마친 독립지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좌우통합을 이룬 통일의회가 출범했다. 뒷줄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이가 이상정이다.
중국 지린성 삼원포 합니하 인근에 있던 신흥무관학교 옛 터.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렸다.

3·1운동 후 본국에서 망명객들이 만주로 이주하면서 서간도의 한인 인구는 25만명에 달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즈음, 만주에선 조국광복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났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 부근 하동 대두자로 본부를 옮기고 합니하 신흥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둬 일종의 군사정부를 설립했다. 상하이 임정에선 여운형을 만주로 보내 군정부와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에 군정부는 1919년 11월17일 임시정부에 참여키로 하고 군정부 대신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꿨다. 이때 북로군정서도 탄생했다. 서로군정서에 참여했던 안동인으로는 최고 책임자인 독판 이상룡을 비롯해 백하 김대락, 김응섭(법무사장), 김동삼(참모부장), 김형식(김대락의 차남·학무사장), 김동만, 김규식, 김원식, 김만식, 류림, 류기동, 김창로 등이고 대구사람으로는 양규열(군무사장), 최윤동(군무국장) 등이 활약했다.

서로군정서에 속한 대구경북인들은 청산리대첩에 참전해 큰 전과를 올렸다. 서로군정서는 남만주지역뿐만 아니라 국내 관공서 습격과 파괴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고령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문상직은 1920년 5월 같은 학교 출신인 서영균(대구), 송정득(달성), 김사용(상주) 등과 관공서 폭파계획을 세우다 발각돼 미수에 그쳤다. 일명 ‘암살음모단 사건’이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대구사람은 배천택·서상락·이종암·최윤동이 있고 안동사람은 이봉희(신흥무관학교 교장 역임, 석주의 동생), 김규식, 김성(成)로(김규식의 아들), 김성(聲)로, 이광민(석주의 조카), 이형국(석주의 조카), 이덕숙, 이목호, 김사순, 권중봉 등이 있으며 권준(상주), 신철휴(고령) 등이 있다. 이밖에 만주에서 활동한 대구사람은 이덕생(서로군정서·의열단), 현정건(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열단), 이일심(재만농민동맹), 송두환(의열단) 등이 있다. 최원택·최춘택 형제, 최충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했다.


1895년 대구에서 태어난 최원택은 1925년 4월 창립한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뒤 일명 ‘적기(赤旗) 시위사건’에 연루돼 일본, 상하이를 거쳐 만주로 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부장을 맡았다. ‘적기 시위사건’은 대구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인 용진단(勇進團)이 개입됐다. 당시 용진단장은 항일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 장군. 용진단 사업부위원인 서상욱이 서울 종로에서 적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돼 대구로 압송됐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이상정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최원택은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돼 때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추가로 받았다. 그는 광복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쓰며 미군정에 저항하다 1948년 월북, 최고인민회의 의장에까지 올랐다. 서로군정서 이후 1924년 설립된 정의부에서 활약한 대구사람으로는 양규열(재무분과 위원), 김의선(총관), 이병규(행정집행위원) 등이 있다.

대구출신으로 만주지역에서 활약하다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인물은 김무열, 김영우, 이증로, 정준수, 손양윤 등이다. 김무열은 만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대공단(大公團)을 조직해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29년 순국했다. 광복단 활동을 했던 김영우는 1918년 만주로 가 폭발물을 국내로 반입하려다 발각돼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이증로 역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한다. 그는 만주로 망명해 고려혁명당 간부와 신민부에서 활동했다. 정준수는 상하이임정 재무관 참모와 의민단 선전부장을 했으며, 손양윤은 26년 경남 일대에서 군자금 5천여원을 모금하고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00원, 엽총 2정 등을 빼앗기도 했다. 그는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10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다시 군자금 모금을 시도하다 체포돼 20년형을 선고받았다. 10년간 복역하다 병으로 가석방됐으나 사망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활약한 대구경북인

1911년 4월11일 중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회격인 임시의정원에 참여한 대구경북인은 이상룡·김동삼·김응섭·안상길·류림(안동), 김창숙(성주), 김정묵(선산), 남형우·김상덕(고령), 한지성(성주), 장건상(구미), 손진형(경주), 윤자영(청송), 백남규·현정건·이강희·배천택·이상정·신공제·이정호(대구) 등이다. 이 가운데 김동삼과 남형우는 29명이 참여한 첫 임시의정원 멤버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할 때 함께했다.

1923년 이상룡은 임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되고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바뀌면서 초대 국무령을 역임했다. 그는 5개월간 상하이에 머물다 다시 만주로 갔다. 김동삼은 임정이 분열되고 침체된 상황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만든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을 맡았다. 국민대표회의는 좌우세력을 합해 130명이 넘는 국내외 대표들이 모여 5개월간 회의를 열었다. 남형우는 임정에서 법무차장, 법무총장, 교통총장을 역임했다. 장건상은 외무차장을 맡았으며 의열단 고문으로도 활약했다. 현 장세용 구미시장의 조부인 독립운동가 장홍상(적우)과 같은 마을(신동) 출신이다. 임정 산하 광복군에서 활약한 대구경북출신은 80여명으로 광복군의 10%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이헌일, 오학선, 이경도, 이정호, 장언조, 정대윤, 정일수는 대구출신이며 권준호, 권오복, 김영춘, 박해옥, 류소우, 류시보, 류시훈, 이동진, 이동학 등은 안동출신이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다 옥살이를 한 대구사람도 있다. 달성 본리동 남평문씨 세거지 문영박과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 경주최씨 최종응을 비롯해 송두환, 정동석 등이 있다.

임정에서 활약한 이들 중 소설가 현진건의 형 읍민(揖民) 현정건은 191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2월 밀입국해 대구로 온 그는 일경에 붙잡혀 1개월여 옥살이를 한 뒤 다시 연인 현계옥과 함께 상하이로 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화요보’의 주필로 독립운동에 힘썼다.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를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영어교사를 했다. 1928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붙잡힌 그는 징역 3년의 옥살이 끝에 32년 석방됐으나 그 후유증으로 6개월여 만에 40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몸 담았지만 민족독립을 우선시해 민족유일당에 참여하는 등 김동삼과 더불어 좌우합작과 통합에 앞장섰다.

이상정은 현정건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해외 독립운동가다. 저항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일본유학을 갔다와 계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25년 중국으로 망명, 허베이성 장가구에서 만주 군벌 풍옥상 부대에서 항일전쟁을 펼쳤다. 이때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과 결혼했다. 그는 30년대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소장) 교수로 활동했다. 40년대부터는 임정에도 적극 참여해 경상도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는 좌파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을 주도하고, 임정 산하 신한민주당과 광복군 창립에도 기여했다. 광복 후 상하이에서 한인 권익 보호에 진력하다 47년 모친상을 당해 9월에 귀국했다. 하지만 다음달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대구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글·사진=중국에서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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