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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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9   |  발행일 2019-04-29 제31면   |  수정 2019-04-29
[월요칼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
원도혁 논설위원

‘인간수명 100세 시대’라고 다들 인용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100년 살기는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변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남성 상당수는 채 80세도 못넘기고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 장수 기대감만 잔뜩 높여 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편견인가. 다만 여성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여성은 80고개를 잘 넘기면 90세, 100세를 기대할 만하다.

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100년을 살아 보니’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설파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세상 이치와 삶의 목적, 살아온 과정을 철학적으로 잘 정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93세 때 밤에 자다가 깨어나 살아온 과정을 정리했다는 분이다. 당시 한 메모는 세 문장으로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한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라고 한다. 김 교수의 모친도 100세까지 사셨다고 하니 아마도 김 교수는 장수 유전자·총명 유전자를 함께 지니고 태어났나 보다. 물론 김 교수가 술·담배를 비롯해 몸에 해로운 기호품은 전혀 하지 않는 등 섭생을 돈독히 해 온 것도 백수(白壽)에 도움이 됐을 테지만. 김 교수는 인생의 의미와 관련해 “삶의 행복은 사랑하는 대상(사람·단체·국가 등)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제 육십을 앞두고 있다. 겨우 육십년 살고서 세상 이치를 제대로 깨달았을 리는 없다. 당연히 김 교수처럼 숙성된 내공과 정제된 철학을 갖추지 못했다. 단지 직장 한 곳에서 30년 넘게 일했고, 환갑이 닥치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선각자·선험자들이 남긴 글을 보면서 고개를 많이 주억거리게 된다. 공감이 가고, 구구절절이 옳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떤 선각자가 인생에 대해 정리한 표현은 다소 허무하지만 적확해 보인다. 그 선각자는 “인생이란, 친구 생일잔치에 다니다가, 친구 결혼식에 다니다가, 친구 부모 장례식에 다니다가, 친구 자녀 결혼식에 다니다가, 친구 장례식에 다니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배반 당하지 않는 도움은 거의 없다”라는 금언이나 “사귀어서 조금도 마음 상하지 않는 사람은 고인밖에 없다”라는 지적에는 박수를 치게 된다. 그래서 도움도 때로는 아껴야 하고, 사귐도 너무 가까이 하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 “사랑하는 사이도 공간을 두라”는 조언은 현자 칼릴 지브란이 오래전에 ‘예언자’라는 책을 통해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해 한 말이다.

다들 느꼈겠지만 수술로 눈의 시력을 회복해보면 보기 좋은 것보다는 보기 싫은 것이 더 많아진다. 이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머리를 씻었을 때보다 구두를 닦았을 때 머리가 더 개운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과 의사는 대개 안경잡이이며, 교통사고로 죽은 장님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뿐만 아니다.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다. 오는 것은 천천히 오고, 가는 것은 빠르다. 조바심을 내는 탓에 같은 거리·같은 시간이라도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복잡한 가족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갈망하게 된다고 한다. 고아가 되고 싶고, 산속의 절로 출가하고 싶어지는 도피 욕망을 말이다. 자고로 인연이 쌓이면 연인이 된다고 했다. 수고를 거듭하면 나중에 고수가 될 수 있다. 습관이 반복돼 관습이 되지 않던가. 어순을 바꾼 말장난 같지만 심오한 철학이 숨어있는 표현이다. 연필을 발명한 사람은 위대하다. 하지만 지우개를 발명한 사람은 더 위대하다고 봐야 한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지워야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현대 사회는 모든 게 풍족하고 넘친다. 하지만 인생에는 공짜·비밀·정답이 없다고 했다.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는 말처럼 폐부를 찌른다.

이처럼 세상 이치는 오묘하다. 그 이치를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김형석 교수는 100세를 살아보고야 세상 이치를 터득했다. 우리는 언제쯤 그 심오한 경지를 파악하게 될까.
원 도 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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