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1700억원 대 700억원

  • 김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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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0   |  발행일 2019-04-20 제23면   |  수정 2019-04-20

요즘 경주 시민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오랫동안 희망해온 원전해체연구소(이하 원해연) 유치가 사실상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5일 원해연을 부산과 울산 접경지인 고리원자력발전소 내에 짓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원해연의 분원 격인 중수로 원전해체기술원은 경주시 감포읍에 들어선다. 얼핏 보면 원해연이 부산과 울산, 경주지역에 나뉘어 설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칭부터가 한쪽은 연구소이고 한쪽은 기술원이다. 사업 규모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연구소는 사업비가 1천700억원대(추정)인 반면 기술원은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700억원대(추정)에 불과하다. 이러니 2014년부터 시민 22만5천명의 서명을 받는 등 원해연 유치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경주 시민들의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다.

경주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원전 6기를 포함해 중·저준위 방폐장, 사용후 핵연료 등 원전 관련 시설물이 밀집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이에 따른 불안과 재산 가치 하락 등 갖은 고통이 있었지만, 원전이 정상 가동되고 원해연이 들어서면 지역 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고 지금까지 묵묵히 참아왔다. 월성 1호기의 일방적인 조기 폐쇄 결정에 이어 최근 원해연 유치가 사실상 무산되면서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경북 동해안에는 경주 6기, 울진 8기 등 14기의 원전이 있다. 우리나라 원전 30기의 절반에 이른다. 이번에 원해연이 들어서는 부산과 울산지역에는 10기가 있다. 원전이 많은 곳에 원해연이 오는 것은 상식이다. 경주는 2017년 8월 산업부가 후원한 ‘소비자 평가 NO.1 브랜드 대상’ 시상식에서 원자력 해체기술 선도도시로 선정돼 대상을 받기도 했다. 시민들은 경주가 원전의 설계-건설-운영-해체-폐기의 전 과정이 집적된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원해연 설립 최적지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같은 믿음은 ‘정치적 셈법’ 앞에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또 하나의 ‘TK패싱’인 셈이다. 경주시의회는 원해연 분리 결정의 즉각적인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경주시원전범시민대책위도 반발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시민들의 분노가 쉬 가라앉지 않을 태세다.

잔꾀는 오래 가지 않는다. 정부는 중수로 해체기술원을 분원이 아닌 독립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명칭은 기술원이 아닌 연구소로 바꿔야 한다. 사업비도 확대하는 것은 물론 방사성폐기물정밀분석센터(가칭)의 경주 설립 등 시민들의 또 다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기억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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